[홀씨이야기] 토끼와 사이다 그리고 사진기
“엄마. 나는?”하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묻지 못했다. 오빠를 짐진 엄마에게, 오빠와 엄마를 짐진 아빠에게 올라타 짐이 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토끼 인형에게 묻는다
아무리 휘저어도 물에 가라앉는 돌 같았다. 아무리 착한아이처럼 발랄하게 굴어도 집안 분위기는 좀처럼 신나지 않았다. 마음과 몸을 피할 곳이 필요했다. 문을 닫고 들어가면 오롯이 내것인 공간 하나. 거기가 장롱이었다. 나프탈렌 냄새가 나고 완전히 어두워진, 나만 들어갈 수 있는 조그만 네모. 그 속에서 겨우 마음껏 울었다. 혼자인걸 견디기엔 너무 어렸다. 장롱에 들어가기 알맞던 꼬마 시절, 지적장애가 있는 오빠 치료를 따라다니다 어느 병원에서 산 토끼 인형.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인형에 집착했다. 처음 토끼 인형에게 말을 걸었을 때, 토끼에게 “엄마”하고 불렀던 것을 아주 또렷이 기억한다. 아무리 외로워도 입밖으로 낼 수 없던 이름. 엄마. 그리고 물었다. 엄마, 나도 사랑하는거지? |
천사는 초록색, 사이다 병에서 산다
가장 멀리 있는 산 보기, 노래 부르기, 손가락 끝을 손톱으로 꾹꾹 누르기. 멀미에 맞서는 대여섯살 된 꼬마의 몸부림이란 퍽 부질없었다. 털털거리는 버스는 지옥보다 무서웠다. 혼자 외로움을 삭일 줄 아는 성숙함에도 불구하고 꼬마 신분으로는 어쩔 수 없이 오빠의 치료여행에 따라다녔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오빠를 치료하기 위해 어디든 갔다.
하루 네 시간 쯤 버스를 탔다. 오빠 학교에 갔다가 치료실에 갔다가 복지관도 갔다. 무지막지하게 멀미에 시달리다보면 엄마가 사이다 한 병을 내밀었다. 그걸 마시면 왠지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마 천사는 초록색 병에 사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악마는 오빠였다. 멀미로 눈물이 날 때마다 확신할 수 있었지만 한편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다.
감추고 싶은 가족의 비밀
오빠를 따라다니면서 오빠가 악마라고 생각하면서, 미웠지 창피하진 않았다. 그런 꼬마를 일깨운 것은 사진기였다. 어딜가나 지겹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러면서 그러는거다. 니가 누구 동생이구나. 어머 불쌍하다. 사진좀 찍자.
단언컨대 나는 지금껏 한 번도 속시원히 내 오빠가 장애인이라고 말한 적 없다. 아빠도 엄마도 그럴 것이다. ‘장애인’이라는 말이 욕이 되는 이 나라에서 그런게 가능했을리 없다. 장애인 가족에게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곳에서 그런게 가능했을리 없다.
장애가 있는 가족을 사랑할 수 있을까
유년의 기억 치곤 참 낭만도 멋도 없다. 그리고 단언코 불행했다. 나역시 가장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할 때, 오빠역시 가장 치료와 교육이 필요했다. 오빠를 감추던 꼬마는 커서 스물 아홉이 됐다. 그게 지금의 나다.
장애인을 형제로 둔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든다. 나까지 근심을 보태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너무 어릴때부터 이를 악물고 버틴다. 착한 아이가 되어야지. 내가 아니어도 위태로운 엄마 아빠를 내가 지켜줘야지. 나는 오빠를 사랑한 적 없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하기로 했을 뿐. 안아주자. 엄마를, 아빠를, 나를. 엄마와 아빠는 책임감에 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가족이 장애아이를 짊어지지 않으면 누구도 손을 내밀어줄 리 없으니까. 그리고 장애가 없는 아이는 뒷전이 된다. 엄마는 최근에야 미안하다며 울었다. 니 오빠 치료 데리고 다닌다고 너 젖도 제대로 못물려 봤다며. 책임감과 미안함에 울던, 외로움에 울던, 사진기 앞에서 울던 우리를 가만히 되돌아본다. 그 좁은 어깨와 웅크린 작은 몸을 이제는 안아주고 싶다. 장애를 이유로 온전히 사랑받지 못한 오빠도 안아주고 싶다. 그리고 이 나라에 홀로 외로울 수많은 장애인과 가족들도 안아주고 싶다. 혼자가 아니라고. |
*글= 이예경 홍보사업팀 간사
장애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짓는 푸르메재단에서 홍보담당자로 일하면서, 그 마음만은 등진 적 없다. 장애인과 가족들에게 함부로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겠다는. 절대 누구도 외롭게 하지 않는 재활병원을 지어 내겠다는.
브라더~ 어려운 시기를 지나 멋진 어른이 되셨네요! 힘든
사람들을 포용하는 힘이 여기에 있었군요. 많은 것을 느끼고 배
웠습니다. 기도하며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