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貧民의 聖者’에서 푸르메 어린이의 친구로 - 5편 사랑과 용서가 희망입니다

“누구도 두 군주를 섬길 수 없습니다. 한 군주를 사랑하다 보면 다른 군주를 미워할 것이고, 한 군주를 열심히 섬기다보면 다른 군주에게 소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이웃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두 군주를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해야 할 것은 재물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이웃과 하나님입니다.” 노무라 할아버지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해 말씀하셨습니다.










▲ 사진자료를 설명하는 할아버지

A씨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노무라 할아버지의 눈빛이 흐려졌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거듭나면 되는 겁니다. 하지만 A씨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의 불쌍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살던 도쿄 집까지 팔아 모든 것을 믿고 지원했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빈민촌에 탁아소를 짓겠다고 해서 서독으로 날아가 서독 교인들을 설득해 빈민촌 탁아소 건립 기금을 보냈지만 그는 탁아소 대신 교회 건물을 지었고, 농민들에게 뉴질랜드에서 소를 사겠다고 돈을 걷었지만 이 돈을 부동산에 투자해 날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할아버지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거지요.


“70년대 한국에 보낸 돈이 7500만엔(약8억원)이 넘습니다. 일본 교회와 젊은 시절 유학했던 미국 교회는 물론 독일과 호주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기금을 모았습니다. A씨는 고통에 처해 있는 한국 빈민들을 살리기 위해 절박하게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습니다. 돈을 잃은 것은 억울하지 않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은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할아버지의 눈빛에서는 애증의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조금씩 연민의 빛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너무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봤기 때문일까요. 아들 마코토와 딸 메구미에게 집에서 라면 조차 사먹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돈을 절약하면 한국에서 몇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데 어떻게 그 귀한 돈을 쓸 수 있었느냐는 것이지요.


 


 



▲ 1973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두 자녀가 국수를 먹는 모습


그런데 노무라 할아버지는 왜 A씨를 도왔을까요. “처음에는 너무 헌신적으로 일했기 때문에 감동받았어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때로는 정보기관을 달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칭찬과 과대평가는 결국 사람을 타락시킵니다. 자신의 활동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외국에서 주목을 받으면서 A씨는 조금씩 변한 것 같습니다. 박수와 칭찬이 사람을 타락시킨 거지요. A씨를 돕던 일본 봉사자들은 물론 주변사람들 조차 무언가 잘못돼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오면서 그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됐습니다.”


두 사람 간 진실이 어떤 것인지 속단할 수 없습니다. 일하는 방식의 차이와 언어의 장벽,  사소한 오해가 조금씩 벌어져 불신과 균열을 가져왔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 가난한 한국 사람들을 위해 청춘을 바쳤던 노무라 할아버지가 한사람 때문에 인생에 깊은 좌절을 겪으신 것은 너무도 불행하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당시 청계천에는 나중에 국회의원이 된 청년 제정구도 빈민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뚝방촌 넝마주이가 되어 청년들과 폐품을 주우러 다녔고, 밤에는 야학을 열어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치며 더 나은 사회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 청계천 모습


그에 대한 기억을 물었습니다 “제정구는 한 번도 돈을 달라는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고통스러운 시대에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기댈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막걸리를 마시며  밤새 토론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변함없이 인생의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바쳤던 사람입니다.”  노무라 할아버지가 기억하고 있는 제정구는 타협할 줄 모르는 원칙주의자였지만 늘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조용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월급을 받아본 경험이 없었던 제정구는 어느 날 갑자기 애가 아파 병원엘 가야 하는데 병원비가 없어서 아버지로서 절망했던 적이 있다고 합니다. 산업화과정의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가난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그는 결국 1988년 종로에 출마하면서 정치인 제정구의 길로 들어섭니다.


노무라 할아버지는 수백권의 앨범 중에서 하나를 꺼내더니 청년 제정구의 사진을 보여주며 “지금도 존경하고 그리운 친구”라고 말했습니다. 서른 살의 제정구는 첫째 딸 ‘아름이’를 무릎에 안고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 딸을 안은 제정구



▲ 2010년 제정구기념사업회 방문 모습(맨 왼쪽이 제 의원의 부인 신명자 여사)


노무라 할아버지의 거실에는 작은 장식장이 있습니다. 맨 위에는 <敬天愛人>이라고 쓴 故 이승만 대통령의 서예작품을 비롯해 태극문양이 새겨진 작은 북, 1970년대 발간된 한국가곡 모음집이 있습니다. 아랫 칸에는 50여 차례 한국을 오가면서 보고 느꼈던 것들을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가 300여개 차곡차곡 쌓여져 있습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일본인, 너무 꼼꼼하게 1970년대 한국의 모든 것을 기록했고 이제 그가 가진 모든 유산을 한국에 돌려주고 싶어하는 분이 바로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 할아버지 입니다.


서울시가 1968년 서울시내 판잣집 정리 사업을 시작해 1978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완공하면서 청계천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성북구 월계동과 길음동, 노원구 백사마을, 송파구 방이동, 영등포 양평동, 경기도 광주와 남양만, 성남, 소래 등으로 점점 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중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도시노동자와 도시빈민으로 여전히 어려운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때 밖에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집에서 키우고 있는 래브라도 리트리버 종 <폴리>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이 녀석이 은퇴해서 그렇지 굉장히 유명한 개에요. 캐논 카메라의 광고모델이었거든요. 지금은 14살이니 사람으로 따지면 90대 노인이지만... ” 할아버지 집에는 폴리 외에도 시각장애인 안내견으로 활동했던 4살 골드 리트리버 종 <몰리>도 있습니다.










▲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살고 있는 몰리와 폴리

할아버지가 버려진 개들을 돌본다는 소문이 나면서 도쿄에서 큰 트럭이 왔는데 그 안에는 유기견 7마리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이 집에는 늙거나 병들어서 버려진 개들이 200여마리가 들어와 편안히 살다가 죽어갔습니다. 어떤 때는 한꺼번에 9마리가 함께 지낼 때도 있었습니다. 그 개들은 지금은 노무라 할아버지의 마당 한쪽에 묻혀있습니다.


노무라 할아버지가 다시 한국과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아동문학가 임정진 선생님에 의해서입니다. 임 선생님이 할아버지가 찍은 70년대 사진을 모델로 한 동화책을 쓰고 싶다고 할아버지에게 연락하면서 30년간 끊어졌던 한국과의 인연이 다시 이어졌습니다. 한국에 오신 할아버지는 소장하고 계신 수 백 권의 사진책자 중 서울 청계천변 모습과 남대문, 평화시장 등 서울의 역사적인 사진 2만여점을 골라 2006년 서울시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게 된 것이지요.


노무라 할아버지와 아들 마코토 씨는 임정진 선생님과 함께 2009년 푸르메재단을 처음 방문했습니다. 장애어린이를 치료하는 작은 재단이 있다는 말씀을 듣고 “꼭 보고싶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푸르메재단 어린이치료실을 찾은 할아버지는 “한국의 대형교회에는 하나님이 없는데 이곳에 오니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실감한다”며 방문 때 쓰실 여비를 탈탈 털어 내놓으셨습니다. 할아버지는 장애어린이의 어머니 손을 붙잡고는 “당신의 고통을 하나님께서 아시니 지치지 말고 아이를 잘 키워 달라”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 푸르메재단 방문



▲ 2010년 용산의 한 중증장애인 시설에서 봉사활동 중인 마코토 씨와 미나 씨


푸르메재단이 중증장애인을 위한 치과봉사활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 마코토 씨와 며느리 미나 씨가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전날 밤 서울에 도착한 이들 부부는 장애인 진료를 하는 동안 쉬지 않고 환자의 입 안에 손전등을 비추고 진료기구를 소독했습니다. 하루만 더 묵고 가라는 간곡한 만류에 이들은 봉사를 마치자마자 한국을 떠났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부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노무라 할아버지는 잊을 만하면 한국을 방문해 생활비에서 아껴 모은 봉투와 저금통을 전달합니다. 아들 부부도 질세라 재단 직원들에게 격려 편지와 함께 치료받는 장애어린이를 위한 칫솔과 케잌을 보내옵니다.


할아버지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마지막 바람이 하나 있다면 내가 한국의 빈민들을 위해 활동했듯이 어릴 때 부터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보고 자란 아들 마코토가 한국의 장애어린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다행히 며느리 미나도 장애인치과에 근무하고 있어서 푸르메치과에 어린이용 칫솔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가 푸르메재단과 더불어 일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청년 노무라와 현재의 모습

 


환하게 웃는 할아버지의 미소에서 1968년 한국 땅을 처음 밟았던 청년 노무라의 미소가 겹쳐졌습니다.


이 때 정호승 선생님의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의 싯구가 떠올랐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나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노무라 할아버지! 그 어려웠던 한국의 1970년대를 당신께서 함께 하셔서 참 고맙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끝)


*글=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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