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貧民의 聖者’에서 푸르메 어린이의 친구로 - 4편 청계천에서 예수를 찾다

산이 높으면 물이 깊은 법입니다.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면 어둠도 빨리 내립니다. 저녁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야마나시현(山梨縣) 여덟 개 高峰에 묻혀있는 노무라 할아버지 댁에는 벌써부터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녁놀을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거실테이블에 놓여있던 플루트를 집어 들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었던 은제 플루트는 한국방문 때 관심을 나타낸 사람에게 선물한 뒤 새로 구입한 중고 플루트였습니다. 할아버지 손가락에서 낯익은 곡이 연주되기 시작했습니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할아버지의 피리는 마술피리였습니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슬픈 곡조는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졌습니다. 노랫소리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자작나무 숲 위에 서서히 내려앉았습니다.


지난해 2월 서울에 있는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에서 연주했던 바로 그 노래였습니다. 푸르메재단을 방문하신 날이었습니다. 진의가 왜곡될 수 있다고 말렸지만 노무라 할아버지는 일본 국민의 한 사람으로 정신대 할머니들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해 소녀상에 꼭 참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의 행동은 우리 국민들에게 용기있는 행동으로 박수를 받았지만 일본 내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욕설을 퍼붓는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북한으로 가라’, ‘몸조심하라’는 협박메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시골 할아버지 집으로 직접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 부부는 그 사건이후 출입을 꺼리고 있습니다.



▲ 노무라 할아버지 방문당시 청계천 모습(왼쪽)과 뚝방촌에 있던 화장실(오른쪽)


“아마 도쿄 시내에 살았더라면 극우파로부터 어떤 봉변을 당했을지 모릅니다. 시골에 사는 것이 다행이지요. 욕설이 가득한 이메일과 전화를 받은뒤 속상했지만 가치 없는 얘기라서 더 이상 대꾸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바보들은 세상 어디에나 있는 법이니까요.” 노무라 할아버지는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습니다. “일본이 그동안 저지른 잘못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일본사람들이 앞으로 짊어져야 할 업보지요.”


청년 노무라는 미국 유학중 친분이 있었던 한국인으로부터 1960년대 후반 ‘가난한 한국 사람들을 도와 달라’는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서울 화곡동에 있는 그리스도신학교에서 보낸 편지였습니다. 노무라는 1968년 한국 땅을 처음 밟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1973년과 1977년 아예 가족과 함께 수원 제암리 학살현장과 탑골공원, 경기도 화성 남양만에 있는 철거민 정착촌 등을 방문했습니다.


청년 노무라가 한국의 빈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서남동 연세대 신학과 교수와 청계천에서 야학과 빈민운동을 했던 고 제정구 의원 등을 통해서 입니다. 서남동 교수는 뒤늦게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 신학부에 입학한 어머니 노무라 가스코 여사의 동창입니다. 서 교수는 1960년대 개발독재 그늘에 놓인 노동자와 도시빈민의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교의 사회적 참여가 필요하다는 민중신학을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 청계천 뚝방촌에서 빈민구제활동과 야학을 열었던 청년 제정구는 젊은 노무라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들을 통해 한국의 사회현실에 눈을 뜬 노무라는 어느 날 청계천 뚝방촌을 방문하게 됩니다. 운명처럼 맞닥뜨린 청계천 빈민가는 그에게 생지옥이었습니다. “한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창문도 없는 조그만 방에 10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누워있었어요. 옷을 들춰보니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파리가 날아다니고 허벅지에 뼈가 드러난 곳에 구더기가 넘쳐나는데도 그냥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청년 노무라는 청계천 목회활동을 했던 사람과 소녀를 들쳐 업고 병원을 찾았지만 소녀는 두 달 뒤 영양실조와 감염으로 숨을 거뒀습니다. 청계천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을 목격한 노무라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이곳을 돕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마을 앞 공중변소에는 매일 아침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습니다. 조금이라도 비가 오면 청계천이 범람해 화장실 오물이 길가로 넘쳐흘렀습니다. 장마철에 판잣집들이 물에 잠긴 뒤에는 어김없이 전염병이 나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악취와 오물, 소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한국 정부는 물론이고 인근에 있는 큰 교회들도 거들떠보지 않는 데 분노했습니다. 청계천은 인분과 쓰레기로 가득 찬 거대한 콜타르와 같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고층빌딩이 날마다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기록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청년 노무라는 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생활비를 아낀 돈으로 1주일에 평균 10통이 넘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청계천과 동대문 시장은 물론이고 전국을 돌며 찍은 사진이 수 만점이 됩니다. 노무라 할아버지는 서울시와 관련한 자료 2만점을 2005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 평화시장 노동장


청년 노무라는 동대문 평화시장 안 봉제공장을 찾아 허락을 받은 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그가 찍은 사진에는 사람들이 비좁은 방에 쪼그리고 앉아 일하고 있습니다.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서 배출한 배설물과 쓰레기가 모여서 굽이치며 흘러나가는 청계천과 평화시장, 그리고 루핑과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판잣집 뚝방촌을 그는 사진으로 고발했습니다.

“한국정부는 내 입국을 거절할 명분이 없어 열흘짜리 비자를 내주곤 했습니다. 돈이 조금이라도 모아지면 한국을 방문한 것이 50여 차례나 됩니다. 그로인해 나는 한국 정보기관의 요시찰 대상이 됐습니다. 서슬 퍼랬던 독재시대에 빈민촌을 찾고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왕래를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비가 새는 판잣집이나 좁은 다락방 공장을 찾아 사진을 찍다가 한국사람들로 부터 독재정권이 고용한 외국인 스파이라는 의심을, 한국정부로 부터는 청계천의 참상을 외국에 고발하려는 불온한 사상을 가진 외국인이라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 젊은 날의 노무라 할아버지


노무라 청년은 여기서 빈민운동에 헌신하고 있던 A씨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 만났을 때 가장 낮은 곳에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비록 일본인이지만 나도 몸바쳐 돕고 싶었습니다. 한국으로 신혼여행을 가는 일본사람을 통해 돈을 전하기도 하고 청계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전시회를 열어 기금을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요구가 점점 커졌습니다. 거의 매일 수신자부담 국제전화를 걸어 갑자기 돈쓸 곳이 있다거나 한국 정보기관으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으니 돈을 부치라고 강요했습니다. 때로는 카메라나 전기면도기를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카메라만 해도 필요하다고 해서 10대가 넘게 보냈습니다.”


인간이란 작은 것에 감동해 마음을 움직이면 목숨을 바치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장 이성적이면서 비이성적인 존재가 인간입니다. 저도 그런 비이성적인 경험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학창시절 단골다방입니다. 그곳 커피가 특별히 맛있다거나 값이 싼 것도, 그렇다고 다방 분위기가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단골이 된 이유는 성냥에 새겨진 문구 때문이었습니다. ‘악마보다 검고 사랑보다 달콤한 티롱다방’이라는 카피 한 줄에 반한거지요. 아마 우리의 선택도 이런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 사진 설명하는 할아버지


대학을 다니는 딸애에게 저는 가끔 ‘지금이 인생에 있어 가장 빛나는 시절이니 소중함을 알아야한다’라고 말합니다. 비교하면 제가 대학을 다니면 80년대 초반은 잿빛 세상이었습니다.  독재정권의 숨막히는 압제 속에 절망했던 시대가 아니었나합니다.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는 ‘인간의 본태성(本胎性)이 절망’이라고 말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으로 내 던져지는 순간 인간은 절망에 기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평생 절망하다가 죽어간다는 거지요. 아마 청년 노무라가 70년대 청계천에서 맞닥뜨린 현실이 이러했겠지요.



▲ 당시 종로의 모습



▲ 70년대 신촌역의 풍경


저녁놀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일 때면, ‘한강의 기적’에서 소외된 채 청계천을 배경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던 노점상, 넝마주이, 지게꾼, 날품팔이 노동자들이 하나둘 집을 찾아 모여 들었습니다. 이들과 공동체 삶을 꾸려가려는 대학생, 의사, 목사, 사회운동가들도 자연스레 밤을 새우며 토론하곤 했습니다.

(5편에 계속됩니다)


*글=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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