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순간에 찾은 행복의 비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합니다』
두 살 때 소아마비에 걸린 후 어머니의 등에 업혀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3년을 동네 형의 등에 업혀 통학한 것이 이슈가 되어 언론은 박일원 선생님에게 주목했다.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그가 이번에는 책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2003년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고 살아온 자신에 대한 아쉬움과 뉘우침을 담은 『신은 나에게 장애를 선물했다』를 낸 그는 이번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합니다』(블루 엘리펀트)를 통해 호주에서 장애인들을 만나며 생긴 여러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다. 지난 5년 간 ‘박일원의 쿠링가이 편지’로 삶에 대한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를 네티즌에게 전해 온 박일원 씨가 이야기하는 호주를 만나보자.
▲ 1973년 1월 13일 동아일보 사회면에 실린 박일원 선생님
책에서 만나는 호주의 배려 문화
박일원 선생님이 바라본 호주의 모습은 장애인에게 특별한 공간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호주를 방문한 후 호주는 여성, 장애인, 개가 살기에 천국이라고 하며 장애인이 대접받는 사회라 칭찬했다. 호주에서는 산소통을 휠체어에 매단 채로, 심지어 바퀴 달린 침대에 누운 채로 나들이를 하는 장애인들을 볼 수 있다.
서로에 대한 배려의 모습은 일상에 소소하게 배여 있다. 어느 교회에서의 아침 예배 시간. 찬송가를 부를 때 모두가 일어서기에 시각장애인 할아버지가 찬송가를 부르는 줄 오해하고 혼자 일어서 있는 순간이 있었다. 난처한 침묵의 순간 어느 여자 한 분이 일어서 그와 함께 서 있었다. 할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이기에 혼자만 서 있었다는 사실도,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고 여자 분이 함께 일어났다는 사실도 모르지만, 누군가의 시선이 있냐와 상관없이 할아버지에 대한 배려와 서로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 어우러진 순간이었다. 혼자면 어색하고 외로운 경우가 많지만 둘만 되어도 든든하다.
책에서 이런 배려의 문화를 나타나는 여러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상대의 입 모양을 보고 말을 이해하는 청각장애인 영주 씨를 위해 선생님들이 평소 기르던 콧수염을 밀고 오기도 하고, 영주 씨와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위해 일반 공무원들이 수화를 배운다.
▲ 호주에서의 박일원 선생님
“집 안에 꼭꼭 숨어 있는 장애인을 바깥세상으로 자꾸 끌어내는 사회,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회,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준 뒤 선택은 장애인의 몫으로 남겨놓는 사회, 비록 도움은 받지만 마음만은 편하게 해주는 사회”의 모습을 그는 선진국 사회로 바라보며 그 단면을 호주 생활에서 경험하고 있다.
배려. 쉽지 않다!
이런 장애를 가지게 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경이롭다.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동네 놀이터와 다름없던 벌목장에서 여느 때와 같이 작업을 하던 중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며 사고를 당한 마크는 하늘을 나는 자유를 얻기 위해 조종사 면허를 땄다. ‘소유한 것을 어느 날 모두 잃어버린다 해도 절대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생활로 보여주는 삶이다. 비장애인에게는 높아 보이지 않는 300미터 산이지만, 하반신 마비가 있는 대니얼 코타에게는 정말 오르기 힘든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휠체어를 허리에 밧줄로 동여매고 9시간 동안 두 팔로만 기어서 그는 산을 올랐다. 장애를 가졌지만, 이들에게 장애는 정말 ‘작은 가시’일 뿐이다.
▲ 장애인 할인을 지속적으로 요구한 후 50% 승차 할인을 받으며 호주 대륙횡단을 할 수 있었다
잠시 공간 이동을 해보자. 한국에서는 어떠할까. 몇 년 전 뇌병변장애 1급 박계형 씨와 언론사 기자가 저상버스를 타고 수유역 인근 정류장에서 혜화동 로터리까지 가면서 겪은 애로사항을 보면, “집에 가만히 있지 왜 나와서 여러 사람 불편하게 만드느냐”는 승객들의 거침없는 불평이 있었다. 장애인이 버스를 타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공간이, 비장애인들에게는 낭비로 여겨지는 문화적인 인식이 한국 사회에는 아직 다분히 존재하고 있지는 않을까. 물론 몇 년 전의 일이니까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타국의 일이지만 훈훈한 장면이 있다. 호주 장애인 말콤이 휴가차 뉴욕에 갔다가 만원인 저상버스를 타게 되었을 때, 운전기사가 일어나 승객들에게 상황을 이야기하자 몇몇 승객이 자연스레 좌석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으며 버스에서 내렸다고 한다.
행복이 보장된 복지국가 한국에 살고 있다??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에 보면 ‘진정한 자비란 자신의 이익이나 욕망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의 기본 권리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만 한다’는 구절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리심의 완성’이다. 이 보리심으로 충만한 사회라면 장애인일수록 더 많이 돌아다녀야 한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고, 세상과 사람들이 거기에 맞춰 바뀐다는 믿음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을까.
‘모처럼 나들이를 한 장애인에게 기다려주는 아량이나 실수, 서툼에 대한 관용이 없다면, 수화로 표현하려는 청각장애인의 의사를 들어주려는 노력이 없다면,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 따뜻한 배려가 없는 사회라면 장애인들의 의지는 결코 싹틔울 수 없습니다. 진정한 복지는 계량적인 물질보다는 사회의 배려와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박일원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복지가 자연스런 문화로 자리 잡은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쉽게 느끼길 바란다.
◇ 박일원 선생님은 1995년 호주로 이민 간 후, 배낭 하나 꾸려 휠체어 뒤에 매달고 홀로 여행을 자주 떠난다. 현재 호주기자연합회 회원으로 호주의 대표 장애인 언론지 『LINK』에 기고하고 있으며 다문화 장애인인권홍호협회인 MDAA(Multicultural Disability Advocacy Association)에서 소수 민족 장애인들의 인권을 위해 일하고 있다.
*글=손기철 기획사업팀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