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貧民의 聖者’에서 푸르메 어린이의 친구로 - 1편 눈덮인 노무라 할아버지의 집을 찾아서
▲ 여우와 여우에게 먹이주는 할아버지
“아! 드디어 왔어요” 미나(美奈)씨가 속삭였습니다.
거실 커튼 사이로 큼지막한 여우 한 마리가 흰 눈을 살금살금 밟고 마당 한가운데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황금색 탐스러운 털을 가진 여우였습니다. 녀석이 얼마나 경계하고 있는지 땅바닥에 축 늘어진 꼬리만 보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참 신중한 녀석이었습니다. 여우는 한 발 한 발 다가가 먹이가 놓여있는 검은 바위에 다다르자 드디어 고기 한 점을 덥석 물고 나뭇가지 속으로 숨었습니다. 한 덩이를 먹어치운 여우는 다시 살금살금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차례차례 모두 여섯 덩어리의 닭고기를 먹어치운 뒤 ‘할아버지! 오늘도 잘 먹고 갑니다’인사하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숲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방문한 노무라 모토유키(野村 基之) 할아버지와 요리코(順子) 할머니가 사시는 집은 산골마을입니다. 도쿄에서 서남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진, 고랭지 채소지로 유명한 야마나시현(山梨懸)입니다. 집 뒤로는 2500미터가 넘는 高峰 여덟 개(八岳山)가 감싸고 있고 앞쪽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후지산(富士山)이 떡 버티고 있습니다. 오늘같이 청명한 날에는 끝없이 펼쳐진 평원 끝에 흰 눈을 이고 우뚝 서있는 후지산을 바라보면 참 장관입니다.
▲ 끝없는 평원 끝에 흰눈을 이고 우뚝 솟은 후지산
노무라 할아버지 집은 우리나라로 치면 설악산, 오대산이 시작되는 강원도 횡성이나 문막 정도라고 할까요. 산세가 험하고 풍광이 뛰어난 만큼 여름에는 시원하지만 겨울이 길고 일 년의 절반 이상을 흰 눈으로 뒤덮는 추운 고장이랍니다. 특히 올해는 길이 미끄러워 할아버지는 큰 맘 먹고 사륜구동 중고자동차를 한 대 샀습니다. 무엇보다 집주위에 살고 있는 야생 동물들의 먹이를 사러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매주 금요일 오후가 되면 할아버지는 얼음 길을 10킬로미터나 달려 읍내 정육점에 갑니다. 겨울밤 찾아오는 귀여운 여우에게는 가슴살을 바르고 남은 닭고기를, 깊은 밤 찾아오는 너구리를 위해서는 돼지비계를 기쁜 마음으로 사기 위해서랍니다. 할아버지에게 여우, 너구리 뿐 아니라 떼를 지어 다니는 사슴과 새들은 누구보다 반가운 손님입니다.
방문 첫날 저녁 여우에게 정성스레 저녁상을 차려주신 할아버지는 이튿날 저녁 대화로 꽃을 피우다보니 어느덧 한밤중이 됐습니다. 제가 할아버지께 한국어로 물었습니다.“어제 여우에게 밥을 많이 줘서 오늘은 안주시나요? 여우는 오늘 굶나요?”그러자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시더니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 길이 남을 명대사를 외쳤습니다.
“여우 이즈 오버, 잇츠 너구리 타임” 그러시더니 밤늦게 찾아오는 너구리를 위해 부랴부랴 저녁식사를 준비했습니다.
▲ 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길
이런 산중에 노무라 할아버지 부부가 사시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뭐냐고요?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1920년대 여성운동을 하셨던 신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일본 여성의 권익향상을 위해 활동하다가 기독교 모태신앙은 가진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머니 뿐 아니라 노무라 할아버지도 자연스럽게 기독교문화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다섯 살이 되는 해 아버지가 결핵으로 돌아가시면서 할아버지의 삶이 소용돌이치게 됩니다.
어머니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대학에 진학하시면서 어린 노무라 할아버지와 여동생을 도쿄에 있는 외갓집과 외삼촌에게 각각 맡겼습니다. 외갓집이 가난했던 할아버지는 학교 소풍 때도 도시락을 싸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여동생을 맡은 집은 그나마 밥 먹고 살기 어렵지 않아 여동생은 고생을 덜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우물물을 길으려온 조선 여인에게 동네 꼬마들이 “조선의 산속에서는 돼지가 꿀꿀꿀 거리는 소리가 들리네...”라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놀리는 장면을 어린 노무라가 목격하게 됩니다.
▲ 할아버지 집
국민학교에서도 일본 아이들이 조선 학생 두 명을 둘러쌓고 “조선인은 돼지다, 너희는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협박하는 모습을 보면서 노무라는 “너나없이 가난한데 왜 착한 조선 사람들을 못살게 굴까”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노무라 할아버지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일본이 조선에 저지른 해악에 대해 마음속으로부터 부끄러운 마음을 갖게 됐고 기회가 되면 한국을 찾아 사죄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인에 대한 미안함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어린 노무라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일본 여성운동과 소비자운동의 대모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어머니 가스코 여사는 일본을 대표하는 여성 지도자 10명안에 뽑혀 미국 백악관 초청으로 두 달간 미국 사회를 둘러보기도 하고 2005년에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 뒤 어머니는 201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아버지 댁을 방문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할아버지가 지난해 2월 이후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더 이상 늦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2월 서울을 찾으신 할아버지는 일본대사관 앞에 종군위안부 소녀상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들께 사죄하겠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위안부 소녀상을 찾아 그동안 연습해온 ‘봉선화’ 노래를 플루트로 연주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참배 모습은 국내외 뉴스와 신문을 통해 퍼져나갔고 이때부터 일본 극우파의 위협이 시작됐습니다. 이메일은 물론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한사람은 직접 할아버지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 선물앞에서 웃은 할머니
위협을 느낀 할아버지 부부는 요즘 외출도 삼가신다고 합니다. 2008년부터 푸르메재단을 찾아 장애어린이의 어머니를 위로하고 기금을 보내주신 할아버지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새벽 6시 30분 서울을 출발한 지 9시간 만에 고부치자와(小淵澤) 간이역에 도착했습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로 시작되는 일본의 문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雪國>처럼 세상이 온통 흰 눈이었습니다. 간이역에는 노무라 할아버지뿐 아니라 반가운 한 사람이 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만나기 위해 4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온 아들 마코토(眞理)씨였습니다. 마코토 씨는 도쿄에서 동북쪽으로 150킬로 떨어진 이바라키현(茨城縣)에서 정신장애인시설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고, 부인 미나 씨는 장애어린이치과에서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푸르메재단이 매달 장애인시설을 찾아가는 치과봉사 <미소원정대>에도 휴가를 내고 참가할 정도로 재단 돕는데 열성인 두 분을 깊은 산속 할아버지 댁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지요.
▲ (위)노무라 가족
(아래왼쪽)할머니가 정성껏 차리신 아침식탁 (아래 오른쪽)할아버지의 어린시절
할아버지가 새로 산 사륜구동 자동차가 힘겹게 눈길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경사가 높지 않은데도 새 차는 계속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제가 “할아버지 새 차가 아니라 너무 낡아 폐차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나하고 같은 처지”라면서 웃었습니다. “드르륵 드르륵”하는 자동차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15분을 넘게 달리는 동안 들판에 있는 은 모든 나무와 바위가 냉기를 뿜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아름다운 자작나무 사이로 드디어 할아버지의 작은 집이 손을 흔들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글=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