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전화 받으세요!

실수하세요! 주위가 행복해져요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400만 명이 희생된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빅토르 프랑클은 그의 저서 ‘죽음의 강제수용소’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체력적으로 뛰어나거나 눈치 빠르게 행동한 사람이 아니라 철조망 밖 붉은 노을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고 절박한 순간에도 유머를 던질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요즘처럼 혼란스럽고 팍팍한 현실 속에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억지로라도 웃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20여 년 전 내 실수담을 소개한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아저씨, 전화 받으세요!” 나는 사무실이 떠나갈 정도로 고함을 쳤다. 시끄럽던 보도국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내게 ‘아저씨’로 지명 받은 정치부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배들은 내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결국 사직을 결심하고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른 새벽부터 보도국과 스튜디오를 뛰어다니며 선배들이 전화로 부르는 기사를 받아 적고 각종 녹음을 하다 보면 몸에선 딸랑 소리가, 입에선 단내가 났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그런데 입사한 지 두 달된 수습기자가 하늘 같은 정치부장에게 ‘아저씨 전화 받으라’고 호통을 쳤으니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두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얼굴이 벌게진 정치부장은 “그래, 내가 자네에게 아저씨뻘인 것은 사실이지!” 하고 쿨하게 웃는 것으로 상황이 끝났다. 고백하건대 ‘아저씨’는 나에게 친근함의 표시였을 뿐이다. 아무튼 그 사건 이후 다른 부장들도 ‘아저씨’라 불릴까 나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실수는 각박한 세상에 웃음 선사


두 달 뒤 전국체전에서도 내 진가는 유감없이 발휘됐다. 내 역할은 각 시도에서 딴 메달을 집계해 방송을 담당한 선배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날도 메달 현황과 기록을 꼼꼼히 메모해 왔는데 저녁뉴스에 출연하기로 한 선배가 보이지 않았다. 모두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드디어 생방송 10분 전. 정신이 반쯤 나간 모습으로 달려온 사회부장은 대뜸 나에게 마이크를 잡으라고 지시했다. 생방송에 출연할 선배가 갑자기 복통을 일으켜 병원에 실려 갔다는 것이다.


수습인 내가 생방송을, 그것도 10분을 남기고 톱뉴스를 하라니. 오랜 시간 공들여 쓴 기사든 시간에 쫓겨 10분 만에 쓴 기사든 결과물로 평가받는 것이 기자이고 시쳇말로 ‘까라면 까야 하는 것’이 기자 세계의 불문율이었다.


▲ 25시간 발로 뛰는 생활


드디어 저녁뉴스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이 울리고 “전국체전 현장 나와 주세요” 하는 앵커의 멘트가 들렸다. “네, 이곳은 전국체전 열전이 열리고 있는 ○○공설운동장입니다. 방금 끝난 200m 남자 결승전에서 한국신기록이 수립된 것을 비롯해…” 정말 일사천리였다. 떨릴 줄 알았는데 웬걸? 난생처음 하는 생방송이 청산유수가 돼 바위를 만나면 휘돌아 나가듯 쉼 없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마음속으로 ‘나 수습 맞아?’ 하고 묻는 여유까지 부렸다. 마지막으로 “CBS뉴스 백경학입니다” 하면 모든 것이 끝이 났다.


그런데 무엇에 씐 것일까? 아니면 나의 완전무결을 시기한 귀신의 장난이었을까? 갑자기 내 입에선 “CBS뉴스

백경학입니까?”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분명히 머릿속에선 “∼입니다!”라고 했는데 입에서는 “∼입니까?” 하는 삶에 대한 궁극적인 물음으로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다. 뉴스를 진행하던 앵커는 내 클로징멘트에 감동했는지 묵묵부답이었다. 인생의 첫 생방송은 이렇게 방송사고로 끝을 맺었다.

사건 이후 내 별명은 ‘까선생’이 됐다. 선배들은 단군 이래 뉴스 클로징멘트를 “∼입니까?”로 청취자에게 동의를 구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라며 경의를 표시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내 목표는 완전무결이었지만 매일 수많은 실수를 했고 나는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유머 없는 인생은 활짝 피지 못한 꽃과 같고 실수는 인생의 깊이를 만든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야근을 한 뒤 선배가 언제 찾을지 몰라 호출기를 비닐봉투에 넣은 뒤 둘둘 말아 머리 위에 동여매고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삐삐가 울리는 바람에 목욕탕이 온통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외교부에서 긴급 기자회견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정성스럽게 닦은 뒤 빨간색 칫솔을 양복 윗주머니에 점잖게 꽂고 참석했다가 이날 9시 TV 뉴스에 내 양복에 꽂혀있는 칫솔이 클로즈업되는 바람에 시청자들 사이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억지로라도 웃어야 건강한 삶 가능

실수는 주위를 행복하게 한다. 그것은 상황을 파악 못한 오버액션일 수도 있고 과잉 열정이 빚은 아름다운(?) 결과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실수가 심각한 잘못이나 결례가 아니라면 척박한 현실에 웃음을 주는 윤활유다. 그래서 나는 단연코 주장한다. 실수하는 사람이야말로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라고.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인류에게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웃음”이라고 말했다. 여러분도 자주 실수를 범하시라! 그럼 주위가 행복해지고 모두가 건강해진다.


동아일보「동아광장」2012년 2월 16일자에 실린

컬럼입니다.

* 글 =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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