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희망이다

[정호승/ 시인]



부모님 집으로 출근한 지 벌써 8년째다. 부모님 아파트 방 한 칸을 빌려 작업실로 쓰기 때문에 일을 하려면 어찌 됐든 부모님 집으로 가야 한다. 어느 날 가족을 먼저 떠나보낸 친지가 "죽음이란 아무리 보고 싶어 해도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한 말이 떠올라,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보고 싶어 할 게 아니라 살아계실 때 열심히 보자는 생각으로 작업실을 부모님 집으로 옮겼다.


부모님 집으로 출근하면 자연히 올해 아흔이신 아버지와 여든일곱이신 어머니를 뵙게 된다. 예전에는 그냥 뵙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청소를 해드리면 되었는데, 요즘은 아들로서 꼭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던 아버지를 목욕시켜 드리고 손발톱을 깎아드리고 이발소에 모셔가는 일 등을 해야 한다.


처음엔 귀가 어둡고 한쪽 눈조차 실명된 아버지를 일상으로 대하는 일이 짜증도 나고 시간이 아깝기도 했다. 노인은 어린아이와 같아서 당신의 입장만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면이 있고,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조차 하지 않는 의존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스로 하려고 해도 이미 육체가 말을 듣지 않는다.


'육체는 슬프다!'


시인 말라르메의 이 시구가 늙은 부모의 허물어진 육체를 볼 때마다 가슴을 때린다. 아버지를 처음 공중목욕탕에 모시고 갔을 때 마치 구부러진 녹슨 못 같은 아버지의 육체를 보고 받은 충격은 크다. 만지면 부서져버릴 것 같은, 다 타버린 종이 위에 간신히 가는 나뭇가지를 세워놓은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여전한 부모님의 내리사랑


그래도 그런 아버지가 시작노트가 든 가방을 들고 밤늦게 퇴근하는 나를 보고 "조심해라! 걸어가지 말고 차 타고 가라!" 하고 말씀하신다. 돌다리를 건너는 예순의 아들을 보고 아흔의 아버지가 조심하라고 한다는 옛말이 조금도 그르지 않다. 언젠가 힘든 일을 겪고 어깨가 축 처져 퇴근하는 나를 보고 아버지가 현관까지 지팡이를 짚고 따라 나와 "힘 내거라" 하고 위로해 주셨을 때 집에까지 걸어가는 동안 '내가 불효자구나' 싶어 눈물이 났다. 이제는 거실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손을 흔드는 아버지의 구부정한 모습을 보면 내일 아침에 살아계신 저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마다 '천년을 함께 살아도 한 번은 이별해야 한다'는 말을 떠올린다. 죽음은 죽음 그 자체도 두렵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기에 더 아프고 두려운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지금까지 부모님 사랑의 힘으로 살아왔다.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존재는 어머니다. 짜증을 내고 화를 내도 어머니는 다 받아들인다. 어머니의 사랑이 그만큼 깊고 크고 무조건적이기 때문이다. 신의 사랑에도 모성적 측면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모성의 본질이 희생이라면 희생 없는 사랑은 없다.


중학교 겨울방학 때 경주 외갓집에서 새벽에 소변이 마려워 일어났는데 누가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군불을 때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외할머니였다. "왔나" 하는 한마디 외엔 섭섭할 정도로 다른 말씀이 없으신 외할머니가 손자 자는 방이 식을까봐 일부러 새벽에 일어나 솔가지를 꺾어 군불을 때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그때 외할머니가 나를 참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안 먹는다고 해도 아침마다 내 몫으로 꼭 고구마 두서너 개를 더 삶아 놓고는 "고구마 안 먹나?" 하는 말을 하루 종일 듣기 싫을 정도로 하신다. 어쩌다 설거지를 해드릴 때도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놔둬라,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하신다.


내 어머니는 남은 치아가 하나도 없다. "돈은 없는데 자꾸 치료하러 오라고 해서 그냥 참다가 나중에 하나씩 빼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어머니가 통증이 심한 치아 사이를 껌으로 때워놓은 것을 보고 치과에 가시라는 말만 했다. 자식이란 부모가 아파도 그런 말만 하는 존재다.


나는 요즘 미장원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허리를 다친 뒤 그만 등이 굽어버린 어머니를 등 뒤에서 꼭 껴안아보기도 한다. 어떤 때는 짓궂게 어머니의 야윈 가슴을 슬쩍 만져볼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어머니가 "얘가 미쳤나!" 하고 질겁하면서도 그리 싫어하시는 기색은 아니다.

사랑과 감사로 보답하는 연말을



이제 12월이다. 또 한 해가 저물어가는 데는 올해도 누구의 사랑에 의해서 내 인생이 이루어졌는가를 깊게 생각해보라는 뜻이 숨어 있을 거다. 그동안 나를 사랑해준 사람을 위해 내 삶의 남은 시간을 되돌려주고,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는 뜻 또한 숨어 있을 것이다.


올 한 해도 늙은 부모의 사랑으로 내 인생은 이루어졌다. 미국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는 죽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소망한다는 의미로 앙상하게 죽은 나무를 크리스마스트리로 세워놓는다고 한다. 내 부모님도 죽은 나무로 만든 크리스마스트리와 마찬가지지만 이제 곧 새로운 생명과 사랑을 싹틔울 것이다.


* 이 글은 동아일보 <정호승의 새벽편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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