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하고 환타지한 사랑의 디스플레이

[박일원/ 프리랜서 작가]


빛이 있으라하니 빛이 있었습니다. 해서 매년 이맘때면 호주에서도 어김없이 길거리나 시내백화점의 크리스마스트리에는 오색 전등이 켜지며 어둠을 밝힙니다. 북반구와는 달리 한 여름에 크리스마스를 맞게 되는 호주인들은 반바지와 반팔 소매를 입은 채 집안에 트리를 만들거나 뙤약볕을 받아가며 잔디밭이나 지붕 위에 크리스마스 용품과 색 전등을 장식합니다.



엔지니어 출신인 토마스는 지난주에 하드웨어 하우스에서 사온 송판을 잘라 붉은 코의 루돌프사슴과 썰매를 만들어 가지가 바닥까지 늘어진 사탕단풍나무 옆에 설치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페인트칠한 눈사람은 잔디 밭 한가운데에 보기 좋게 세웁니다. 우체통 옆에는 두터운 솜 외투를 입은 산타 인형이 선물상자를 들고 금방이라도 호, 호, 호 하며 한 해 동안 수고한 집배원에게 다가설 듯 서있습니다. 아들 스티브가 꺼내온 이 산타할아버지 인형은 작년에도 사용한 것인데 손질하지 않은 채 벽장 속에 처박아 놓았기 때문에 수염에는 먼지와 거미줄이 잔뜩 묻어 있습니다.


주머니 다람쥐가 살고 있는 검트리(Gum Tree)의 우듬지에서부터 늘어진 오색 전등은 아래로 내려와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굴뚝을 한 번 휘감아 돌은 후 창문틀을 따라 길게 늘어지면서 옆 집 쥐똥나무 울타리까지 뻗어나가 있습니다. 작업 창고 안에서는 안주인인 메들레인과 지난주부터 방학에 들어간 딸 에이미가 구유 안에 아기 예수를 들여놓고 그 주위에는 동방박사를 배치합니다. 이렇게 아침부터 온 가족이 시작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집 꾸미기 작업은 하루해가 다 넘어갈 때까지 이어 집니다. 하루 종일 사슴을 만들고 눈사람을 새로 칠하느라 피곤해질대로 피곤해진 토마스는, 이제는 끝났나 싶었는데 다시 간들간들하는 사다리를 놓고 지붕 위로 위태롭게 올라갑니다. 굴뚝 위에 알루미늄 판을 오려 만든 별을 달아 놓기 위해서지요.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이렇게 장신구와 조명으로 집을 꾸려나가는 일은 토마스가 살고 있는 골목길 전체에서 이뤄집니다. 그런데 이런 집 꾸미기 행사는 이 동네에서는 60년이나 지난 오랜 전통이라고 하네요. 어느 집에선가 처음에 창가에 등을 달아놓기 시작한 게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는 온 동네의 집들이 모두 참가하는 행사가 된 것이지요. 그동안 주민은 여러 번 바뀌어도 이런 전통만은 지속 되었는데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수 천 개에서 때로는 수 만개의 색 전구가 골목길을 밝히는 이 아름답고 황홀한 빛의 축제를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윽한 밤이 되어 이집 저집에서 점등하기 시작하면 현실은 어둠속으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온 동네가 동화 속의 착하고 환타지한 세계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아침 출근길에 말다툼을 했던 부부도 새로 이사와 서먹서먹했던 이웃도 또 혼자 사시는 할아버지도 동심으로 돌아가 이제까지의 근심과 이기심과 고독을 툴툴 털어버리고 철부지 아이가 되어 하나 둘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주민들은 이웃과 인사를 나누며 누구 집의 치장이 더 잘 됐나 품평회를 하지요.


대화가 어느 정도 무르익어갈 즈음이면 평소 고국 네덜란드의 눈 덮인 전나무 숲을 그리워하던 디크스탈 씨는 두터운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로테르담 에라스무스 대학 시절의 가슴 설레던 크리스마스 파티를 추억합니다. 이태리에서 이민 온 피터는 한 조각의 셀라미스 치즈를 놓고 형제들과 싸우던, 생활이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남부 이탈리아의 혹독한 겨울나기를 떠올립니다. 그리고 한때는 잘 나갔지만 지난번 태풍에 바나나 농사를 망친 후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호주 토박이인 봅은 명멸하는 불빛을 바라보며 인생의 덧없음을 상기합니다.


그런데 이 크리스마스 집 꾸미기는 동네사람들만의 행사는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집안이 아닌 밖에다 치장을 하고 반짝이는 알전구를 나무 여기저기 달아 놓는 것은 자기들만이 보고 즐기자는 거는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오히려 굴뚝과 지붕과 잔디밭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나보다는 타자를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사랑의 디스플레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소외된 계층들이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찾아오기도 합니다. 양로원이나 장애인 재활단체 등에서 버스를 빌려 이 빛의 축제를 보러 단체로 찾아오는데 그들 대부분은 도심까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끼러 나가지 못하는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이거나 멀리 가족을 떠나보낸 외로운 할머니 할아버지입니다.



버스가 도착하고 얼마 안 있으면 동네 사람들은 비스킷 바구니와 더운 물이 담긴 주전자를 들고 나와 방문객들에게 다과를 대접합니다. 그들 중 일부는 모포와 얇은 겉옷을 갖고 와서 어깨와 무릎을 덮어주기도 하지요. 한 여름이지만 밤중에는 이슬과 한기에 몸이 상할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호사스럽게 대접을 받고 나면 평소 바깥나들이 특히 밤 외출을 하지 못했던 노인들과 장애우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며 팝콘 같은 웃음이 번지기 시작합니다.



밤이 깊어지면 버스를 타고 온 방문객들도 모두 돌아가고 여기저기서 솜사탕처럼 끈적끈적한 하품이 터지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하나 둘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좀 전까지 왁자했던 세상이 쥐 죽은 듯 조용해집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얼마 안 있어 침실 창문이 사르륵 열리며 좀 전에 안으로 들어갔던 아이들이 스머프처럼 살금살금 기어 나와 잔디밭으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파자마 차림의 아이들은 무릎을 고추 세운 채 쪼그리고 앉아 졸린 눈을 부비며 영롱한 굴뚝 위의 불빛과 배불뚝이 산타와 밀짚과 유칼리 가지로 장식된 마구간을 꾸벅대며 바라봅니다.


이때쯤이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하늘에 뜬 별과 지붕에 세워놓은 별이 비로소 눈맞춤을 합니다. 그러면 땀흘려가며 ‘타인을 위한 불 밝히기’에 열중해왔던 쿠링가이에는 영광과 평화의 눈이 펄펄 날리기 시작하지요.


박일원 님은 1995년 호주 이주하여, 13년째 시드니 근교인 쿠링가이에 거주 다문화 장애인 옹호협회(MDAA)에서 근무하며, 한국 KBS라디오와 열린지평, 장애인신문 등에 호주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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