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러운 나, 촌스러운 나의 노래
[이미자 / 가수]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연예인답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보통 여자와는 다르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촌스럽다, 까다롭다, 빡빡하다는 말까지 골고루 들어봤다. 지금은 바로 그런 면 때문에 내가 여태 잘 버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촌스럽다’는 말은 데뷔 때부터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정겹기까지 하다. 나도 촌스럽고 내 노래도 촌스럽고, 나와 연관된 모든 것에 촌스럽다는 말이 빠져본 적이 없다. 글쎄, 촌스럽다는 소리를 들어서 기분 좋을 사람이 있을까마는 난 정말로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예 ‘그래, 난 못생기고 촌스럽다.’ 그렇게 인정해 버리고 말았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내 외모엔 자신도 없었고, 또 외모로 인정받고 싶은 생각도 없다. 연예계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감각이 좋아졌는지 요즘은 촌스럽다는 소리를 별로 듣지 않는다.
▲ 정겨움과 '촌스러움'이 남아있는 이미자 님의 옛 앨범들
지금도 난 겉멋 든 사람이 될 바엔 차라리 촌스러운 사람으로 남고 싶다. 나의 촌스러움에 큰 몫을 한 것은 물론 노래였다. 그것도 패티 김과 비교되면서 빠지지 않고 나온 말이 ‘촌스럽다’였다. 우리 둘은 노래 스타일이나 외모, 성격 등 모든 것이 달라서 자주 비교가 되곤 했다. 서양적이고 화려했던 패티 김은 세련의 대명사로 불리며 그가 부르는 팝 계열의 노래도 지성인들이 좋아하는 수준 있는 것으로 인식됐다. 반면, 동양적이고 촌스러운 나는 기껏 ‘뽕짝의 명수’로 불릴 뿐이었고 내 노래 트로트 역시 서민들이나 즐겨 듣는 통속적인 것으로 평가되기 일쑤였다.
한 가지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유일하게 부러워했던 사람이 바로 패티 김이다. 그녀의 창법을 몹시 부러워했다. 아마도 트로트를 멸시하고 냉소하는 것에 노이로제가 걸려서인지도 모른다. ‘나도 패티 언니처럼 영어를 잘했으면, 언니가 부르는 팝송을 나도 불러봤으면’ 하는 생각도 자주 했다. 감사하게도 내 노래와 목소리에 대해선 늘 과찬이 뒤따랐지만 사실 평생을 트로트만 부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 늘 서로의 비교대상이 되었던 이미자 님과 패티 김(사진 오른쪽부터)
지금은 과분하게도 ‘국민 가수’라는 말도 듣지만 한때는 촌스럽고 노래도 격이 낮다는 평가를 받아야 했고, ‘그런 노래를 세종문화회관에서 부르면 품위가 떨어진다’고 공연을 거절당하기도 했다. 지금에야 털어놓지만 1970년대 한때나마 가수 생활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트로트가 아닌 다른 노래로 바꿔 불러볼까도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참 경솔하고 철없는 생각이었구나’ 하는 후회와 함께 그 고비를 잘 넘긴 게 참으로 다행스럽다. 나는 트로트보다는 전통 가요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며, 또 우리의 전통 가요가 널리 보급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이전 세대들은 일제 치하, 광복, 6·25 전쟁, 보릿고개 등 한시도 편할 날 없이 서럽고 고달프고 배고픈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일까. 구슬픈 노래라도 들으며 실컷 울기라도 해야 그나마 아픈 가슴을 달랠 수 있었고,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었다. 굴곡 많은 시대를 살아온 우리네 이웃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노래가 바로 전통 가요다.
어쨌든 젊은 시절 한때는 벗어나고도 싶었지만 결국 나의 운명으로 남아 버린 트로트. 1970년대에 나는 트로트를 버리지 못할 바엔 애정으로 끌어안아야 했고, 그건 지금 생각해도 가장 옳은 선택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노래에도 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도 그 맥을 이어온 한 사람이라는 사명감 때문인지 나이가 들수록 그 맥이 꼭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전통 가요 얘기만 나오면 말이 많아지는 것은 그만큼 내 바람이 간절하기 때문이리라.
* 이 글은 이미자 님의 자전 에세이 <인생 나의 40년>(황금가지 발행), <월간 마음수련 10월호>에 실린 글로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