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승아, 이제는 실뭉치가 풀리는 일만 남았다.
[정호승/ 시인]
동화작가 정채봉 형과 함께 수원에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형은 화서역 부근에 살았고, 저는 율전역(현재 성균관대역) 부근에 살았습니다. 원래 형과는 월간 ‘샘터’ 편집부에서 같이 일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샘터’에서 일할 때는 형이 제 윗사람이었던 탓으로 그리 가까이 지내지 못하고, 오히려 제가 ‘샘터’를 그만두고 나서 더 가까워졌습니다.
형은 제가 사표를 제출하자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이미 다른 직장으로 출근하겠다고 약속을 한 저는 고민이 되어 수원 화서아파트로 형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일요일이라 형은 이미 가족들하고 어디로 나가버린 뒤였습니다. 저는 사들고 간 과일 봉지를 들고 온종일 그 집 앞을 오가며 기다렸습니다. 아파트 마당에 어둠이 찾아오자 형이 아이들을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야, 호승이 니가 찾아올 것 같아서 일부러 도망 나갔는데 아직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나?”
형은 나를 보고 웃음부터 먼저 터뜨렸습니다. 아마 그때가 형이 대표작 ‘오세암’을 쓸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뒤 형이 수원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저도 수원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네 살 된 아들을 데리고 율전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가 살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아이 엄마와는 결별 상태였습니다. 법적으로 헤어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아주 어정쩡한 상태에서 아이만 제가 키우는 형편이었습니다. 상황이 그러하니 힘든 일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가 없지만 갈수록 아이 엄마하고의 일은 꼬이고 꼬여 어디를 바라보아도 헤어날 구멍이 없었습니다. 사면초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서울과 수원을 오가는 전철을 타고 출퇴근한다는 일은 저에게 큰 기쁨이었습니다. 안양만 지나면 그대로 시골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전철의 창 너머로 보이는 산과 들과 하늘은 저에게 큰 위안을 주었습니다. 자연이 인간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 월간 ‘샘터’ 앞에서의 고(故) 정채봉 작가와 그의 작품 <오세암>
저 어둡고도 어두운 80년대의 초반을 정호승과 나는 수원의 변방에서 살았었다. 그가 산 동네의 이름은 ‘밤밭’이었고, 내가 산 동네 이름은 ‘꽃뫼’였다. 사전에 한마디의 상의도 없던 정호승이 이사를 왔노라고 불쑥 연락을 주었을 때 나는 한편 반가웠고 한편 궁금했다.퇴근길에 우연히 형을 전철에서 만났을 때는 수원역에서 같이 내려 술을 한잔씩 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민음사에서 <새벽편지>라는 제목의 시집을 준비하던 중이어서 형에게 발문을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형은 그 글에서 그 무렵의 저를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서울에서 그의 등을 떠밀어 보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막연한 바람을 알아보려고 나는 그의 집까지의 오 리 길을 철로변을 따라 걸었다. 논에는 벼꽃이 피어 있었고 밭에는 콩꽃이 그리고 깨꽃이 한창이었다. 깨꽃의 뒤꽁무니를 빨면서 그의 집에 이르러 보니 노모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얘가 대학도서관에 갔심더. 도시락까지 가지고 갔으니 내가 불러 오지예.”
나는 순간 정호승이 서울의 어떤 바람에 떠밀려온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침묵하고 있었는데, 이제 허심(虛心)이 된 그가 충전을 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정호승과 나는 그의 아들 영민이의 손을 나눠 잡고 솔밭길을 걸었었다. 산새들을 날리며 풀 위에 앉아서 우리는 문학보다도 우리들 일상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폭우에 맞선 비닐우산과 같은 고통을 때때로 나한테 들켜준 것에 대해 나는 그에게 고마워한다.
▲ 이 글을 쓴 정호승 시인과 그의 시(詩)가 담긴 <새벽편지>
그래서 저도 형이 병상에 있을 때 그 말을 했습니다.아마 그 무렵이었을 겁니다. 저는 제 혼자 부여안고 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누구에게라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일들을 형에게 털어놓았습니다. 노모가 어린 영민이를 키우는 이야기, 이혼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통스러운 일 등을 이야기하자 형이 제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호승아, 이제는 실뭉치가 풀리는 일만 남았다. 그러니 너무 힘들어하지 마라.”
저는 형의 말을 듣는 순간,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맞아. 실뭉치는 언제까지 뭉쳐지는 것만은 아니야. 뭉쳐지기만 한다면 그것은 이미 실뭉치가 아니야. 실뭉치는 어느 시점에 풀어지기 위해서, 풀어져 새로운 옷을 짜기 위해서 뭉쳐지는 거야.’ 저는 그런 생각을 하며 형의 말에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 뒤 저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이제 실뭉치가 풀리는 일만 남았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일은 실뭉치가 풀리는 한 과정이다.’ 생각하고, 꿋꿋이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좀 걸렸지만 그 고통의 실뭉치는 형의 말대로 풀려나갔습니다.
“형, 이제 형한테도 실뭉치가 풀리는 일만 남았어. 그러니 힘내!”
형이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러나 형의 그 실뭉치는 그만 죽음을 통해 풀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형의 그 말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제 삶이 힘들 때는 ‘이제는 실뭉치가 풀리는 일만 남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정말 그때부터 실뭉치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합니다. 풀리는 실로 어떠한 옷을 새로 짜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게 됩니다.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저세상에 있는 형이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형은 시집 발문에서 저를 또 이렇게 쓴 적도 있습니다.
수원행 전철의 막차 안에서 하반신만으로 정호승을 알아본 적이 있다. 그 전철은 초여름의 밤바람을 들이고자 창문을 열어두고 있었는데, 나는 신문을 보고 있던 눈을 들어 무심히 앞 유리로 시선을 옮기다 보고 말았다. 하얀 남방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은 크지 않은 몸매, 그리고 개울가의 돌멩이처럼 다부진 정호승의 주먹하며.
전철의 유리 창문이 반쯤 내려져 있었으므로 거기에 투영되지 못한 상반신은 공간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그는 책을 보느라고 두 사람 건너에 있는 나를 감지하지 못하였던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그의 곁에 있음을 알리지 않았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는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감도처럼 정호승을 그냥 보는 것으로 충분히 넉넉할 수 있었다.
정호승 님은 흙 묻은 조그만 고구마 하나에서도 행복을 찾는 시인입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따스한 봄볕 같은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완성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들려주는 시와 글을 많이 썼습니다. 지은 책으로 <포옹>,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항아리> 외 다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