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시선을 견디는 법
[고정욱 / 아동문학가]
요즘은 전국 각지 초등학교나 도서관, 사회단체 등에서 강연을 많이 요청받는다. 그런 곳에 가게 되면 하는 이야기들은 거의 비슷하다. 대개 “더불어 사는 세상을 위하여”라는 강의 주제에 맞춰 강연하게 되는데 휠체어를 탄 내가 무대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으면 사람들은 일단 눈이 휘둥그레진다. 당당한 표정의 환한 얼굴로 청중을 제압하기 때문이다. 여느 장애인의 우울한 모습이 아닌 것이다.
강의를 열면서 나는 가끔 묻는다.
“안경을 쓴 사람은 장애인인가요, 장애인이 아닌가요?”
장애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장애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안경 쓴 사람은 시력이 나빠진 것이기 때문에 장애인이 맞다. 원시시대라고 가정을 하면 아마 눈 나쁜 사람이 제일 먼저 적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가까운 데, 먼 데를 구분하지 못해서 위험한 짐승이 다가와도 미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안경을 쓴 사람을 장애인이라고 여기지 않는 이유는 두가지다. 그 첫째는 안경이라는 아주 간단한 보조구만으로 시력 저하의 약점을 이겨 내고 아무 문제 없이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안경 쓴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인구의 반에 가까운 사람이 안경을 쓰고 있다. 그러니 안경 정도 쓴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멋으로 안경을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과거에는 눈 하나인 사람만 사는 마을에 눈이 두 개인 사람이 가면 장애인이라는 우스갯말이 있었다. 이는 과거 안경이 귀하던 시절, 안경 쓴 사람을 목사라고 놀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 지난 5월 3일, 푸르메재단이 개최한 ‘고정욱 작가의 재능나눔 이야기’ 에서 서울청운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있다
가장 먼저 내가 장애를 느낀 것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였다. 운동장에 모여서 춤추고 노래하는 율동을 배우는데 어머니 등에 업혀만 있어야 하는 나는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러자 오지랖 넓은 아주머니가 나서서 말했다.나 역시 어린 시절 걸린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되면서 남의 시선을 수없이 느끼며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요즘이야 장애인들이 많이 세상에 나와 돌아다니기 때문에 구경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가 될 지경이었다.
“아니, 얘도 의자에 앉아서 팔로라도 춤을 춰야지, 왜 업혀만 있어!”
잠시 뒤 나는 누군가가 가져온 의자에 앉혀졌다, 비로소 나는 그때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교생이 서서 춤추고 노래하는데 나 혼자 의자에 떨렁 앉혀져 있는 그 기분은 정말 절해고도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춤을 췄는지 안 췄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 나는 분명히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남들의 시선을 평생 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다.
그날 이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처음 보는 아이들의 놀림과 시선을 계속 받아야만 했다. 어머니가 업고 가면 지나던 할머니들이 꼭 한마디씩 했다.
“왜 업혀 다니느냐?”
“인물은 훤한데 다리가 아픈 모양이네.”
이것은 거의 매일 벌어지는 일이었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니 단체기합이 있었는데 한 아이가 잘못하면 전 학급이 벌을 받는 것이었다.
“운동장으로 모두 모여!”
모든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뛰어나갈 때 나는 제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너는 왜 안 나가?”
선생님의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정말 굴욕스럽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다리가 불편해요.”
난들 왜 나가서 뛰고 싶지 않고, 아이들과 똑같이 벌 받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지 못하기에 나는 단체기합 때면 어김없이 내가 장애인이라는,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아야만 했다.
▲ 성대신문(성균관대학교 학보) 주최 소설공모에서 단편소설이 당선돼 조좌호 총장에게 상장을 받고 있는 고정욱 작가
대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공식 행사가 끝나자 갑자기 마이크를 잡은 교직원이 대학 교재를 나눠 주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자 입학식 하는 동안 서 있느라고 여러분 고생했죠. 모두 제자리에 앉아.”
그 순간 수천 명의 대학생이 일제히 자리에 앉았는데 목발 짚은 나 하나만 광장에 우뚝 서 있었다. 나에게 쏟아진 그 모든 시선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학에 와서까지 그러한 시선을 받아야 한다니. 결국 5분여의 시간을 나 혼자 서서 꿋꿋이 버틸 수밖에 없었다. 대학엔 또 다른 형태의 단체기합이 있었다.
물론 나는 이미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사람들의 그런 시선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은 장애인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자유롭게 활보하면 장애인을 그렇게 신기한 구경거리 보듯 하는 사람이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고 믿는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의 장애인을 보는데 누가 그걸 신기하게 여기겠는가.많은 장애인을 만나서, 가장 큰 상처를 입는 것이 무엇이냐 물어보면 다른 사람들 시선이라고 한다. 동물원 원숭이 보는 듯한 시선. 어린아이들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어른들까지도 장애인이 길에 다니면 보니라 목이 돌아갈 지경이다. 씩씩한 나의 아내조차도 나와 함께 길로 다니면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보는 그 시선을 견디기 어렵다고 한다. 누군가 말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들 안에 지옥이 있다고.
하지만 편의시설이 부족하고, 교통시설이 부족한 우리 상황에서 단기간 내에 많은 장애인이 자유롭게 활동한다는 것도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사회의 전반적 수준이 총체적으로 올라가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장 실현 가능한 방법은 장애인이 나타났을 때 그들이 나의 무심한 시선에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시선만으로도 사람을 지옥에 가 있는 느낌이 들게 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은 잊고 있다.
미국에서는 교통법규나 질서를 어기는 사람을 직접적으로 나서서 제지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이 하는 유일하고도 무서운 제재는 정신 나간 녀석이 아니냐는 듯이 한번 쓱 보는 것이다. 그깟 시선이 대수냐고 여길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게 보는 것이 가장 무서운 질타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장애인을 그렇게 봐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장애인들을 무심히 쳐다보지 않고 의식적으로 외면하며 지나가는 것, 그게 진정한 배려이다. 물론 곤경에 빠지고 도움을 원하는 장애인에게 다가가서 어려운 점을 물어봐 주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혼자서 아무 문제 없이 자기 갈 길을 가는 장애인을 끝까지 따라가며 보는 것은 그 장애인을 두 번 죽이는 행동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강연을 열심히 다니는 이유도 그것이다. 나와 같은 장애인을 어린이들이 많이 겪고 접하다 보면, 또 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어린이들이 커서 주인이 되는 20년, 30년 뒤의 세상은 분명히 지금보다 나아지리라 믿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스스럼없이 돌아다니는 세상, 그러한 세상이 비장애인들도 편안하고 안락한 세상이라고 나는 믿는다.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은 비장애인을 위해서도 유용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을 구경거리 보듯 보지 않는 것, 지금 당장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더불어 사는 세상의 아주 쉽고도 기초적인 출발점이다.
이 글을 쓴 고정욱 님은 성균관대학교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문학박사입니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은 그는 1급 지체 장애인으로 휠체어를 타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의사의 꿈대신 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며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작가가 되었습니다. 스테디셀러인 그의 작품으로는《아주 특별한 우리 형》, 《안내견, 탄실이》,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희아의 일기》, 《가방 들어주는 아이》가 대표적이며, 특히 올해 출간된《희망을 주는 암탐지견 삐삐》는 재활전문병원 건립을 위해 국내 최초로 인세 전액을 푸르메재단에 기부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