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사랑한다며
[박일원 / 프리랜서 작가]
지난 일요일이었습니다. 이른 저녁을 먹고 개를 데리고 동네를 한바퀴 돌고 왔더니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피터라는 분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는 나중에 따로 초청장을 보내겠지만 그 전에 자신들의 결혼 50주년 금혼식 파티에 참석해 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당연히 간다고 그랬지요. 그간의 오고간 정분도 있고 헉스베리 강에서 배를 한 척 빌려 선상파티를 열 예정이라고 하는데 이런 호사가 이디 있겠습니까. 그것도 밀림처럼 숲이 우거진 쿠링가이 국립공원의 속살을 훑으며 지나갈 거라는데 말입니다. 무척 신나는 일이지요. 단지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그래도 빈손으로 갈 수는 없고 뭔가 준비해야 하는데 뭐가 적당한가를 두고 고민하는 거였습니다. 장미꽃을 한 다발 준비할까, 아니면 얼마간의 현찰로 대신할까를 두고 한참 고민했지요.
피터는 네덜란드에서 20대 초반에 지금의 부인인 한나를 만나 50년 동안 다섯의 자녀를 두고 이제까지 화목한 가정을 지켜왔습니다. 그는 우리 귀에도 익숙한 립튼 홍차와 도브 비누 등의 생필품을 만드는 유니레버라고 하는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느라 독일, 포르투갈, 칠레 등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근무지인 호주에서 은퇴한 후 정착하게 되었는데 아직까지 국적만큼은 존경스러운 자신들의 여왕 때문이라며 네덜란드를 굳건히 지키고 있지요.
언젠가 그동안 어느 나라가 가장 살기 좋았느냐고 물었더니 각 나라가 다 나름대로 다 좋았다고 평범하게 교과서처럼 말합디다. 네덜란드에서는 봉급은 작았지만 미리암과 주겐을 낳아 애들 기르는 재미로 살았고 셋째인 샌더가 태어난 포루투칼은 사람들이 참 착하고 순진해서 좋았고 이네스를 낳은 칠레와 막내인 타이스가 태어난 스웨덴에서는 지위가 높아져 봉급이 많아서 또 좋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식들이 태어나 자란 곳이 각기 다릅니다. 현재도 다섯 명의 아들딸들은 제각기 다른 곳에 떨어져 살고 있지요. 이번 금혼식 행사를 위해서 독일에서는 장남이 찾아오고 네덜란드에서는 큰 딸이 호주로 오기 위해 비행기표를 끊었다고 하네요. 호주에 살고 있는 자식들도 서부호주 등으로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시드니의 집에는 두 노부부만 살고 있습니다.
그 분들의 거실 장식장에는 이 다섯 명의 자녀사진과 함께 자신들이 컴패션(Compassion)을 통해 매달 후원하는, 아프리카와 중남미 지역의 또 다른 5명의 까무잡잡하고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아이들 사진이 놓여 있는데 그들은 모두 장애아로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합니다. 그들 중에는 청각장애아도 있는데 이제는 성장해서 거의 스스로 독립할 시기가 되었다며 새롭게 후원할 아이를 찾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금혼식 날짜를 며칠 남겨 놓고 초청장이 우편으로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배 출발 시간에 늦지 않도록 모두들 시간을 꼭 지켜달라고는 내용이 굵은 글씨로 인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미에 자신들은 이미 많은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다며 정 마음의 표시를 하고 싶다면, 선착장 옆에 마련된 어린이구호 결연단체인 컴패션 모금함에 약간의 돈을 기부해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여기 호주에 와서 제가 색다르게 느끼는 것은 기부문화입니다. 이곳의 기부 풍습은 친척이나 친구와 같이 가까운 사이에서 정의 표시로 혹은 ‘얼굴’ 때문에 오고가는 부조의 형식보다는 공적인 관계에서 주로 기부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처럼 관혼상제 시 주고받는 부조형태는 일반화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대신 작게는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캔디나 초콜릿을 팔아 모은 푼돈을 어린이 병원에 기부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길거리나 쇼핑센터 등에서 지나는 행인들이 소아암을 위한 치료연구나 산불 자원소방관들을 위한 모금함에 돈을 넣는 자선행위와 평생 모은 자신의 재산을 후손에게 물려주기 보다는 대학의 발전기금으로 쉽게 내놓는 등 익명의 대상자를 향한 기부문화가 발달해 있지요.
남을 돕는다는 거는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럼에도 저는 그런 일을 하는 분들을 주위에서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런 걸 보면서 감탄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히 놀라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저의 그런 놀라움 자체가 한없이 부끄러운 일인데 말이지요. 저는 이미 주기 보다는 받는데 너무도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창피하고 또 뒤가 자꾸 켕깁니다.
그대를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했다.
이웃을 사랑한다며 또 나를 사랑하고 말았다.
가만히 푸른 하늘이 내려다본다.
위의 문장은 2001년 어느 여름날, 서울 여의도 교보증권 건물에 걸린 현수막에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쿠링가이 국립공원 위로 보이는 하늘도 참 맑고 푸르게 보입니다.
박일원님은 1995년 호주 이주하여, 13년째 시드니 근교인 쿠링가이에 거주 다문화 장애인 옹호협회(MDAA)에서 근무하며, 한국 KBS라디오와 열린지평, 장애인신문 등에 호주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