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맥과 케찹

[최성환/푸르메재단 간사]


내 시력은 어린 시절부터 좋지 않았다. 안경의 선명함을 빌리지 않고서는 여러 불편함을 경험하곤 했다. 특히, 멀리서 인사하며 오는 누군가가 선배인지 후배인지, 어떻게 인사해야 할 지 몰라 허둥지둥 거렸던 경험을 반복해서 겪었다. 뜻밖의 오해를 사거나 웃음거리가 되는 몇 번의 상처를 입은 후에도 약간씩 고개를 숙이며 걸었지 좀처럼 안경을 끼려하지는 않았다.



▲ 어린 시절 최성환 간사 (오른쪽)

내게는 한 살 터울의 형이 있다. 같은 나무에서 비슷한 태양과 바람을 마주하며 자라난 두 열매가 어쩌면 그렇게 서로 다를 수 있는지 사람들은 늘 의아야 했다. 깔끔한 외모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반장, 학생회장 등 학우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형과 달리 나는 항상 빅맥 세트메뉴의 프렌치프라이를 찍어 먹는 케찹처럼 ‘코흘리개 주변인’ 역할을 담당했다. 지금 생각 해 보니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는 내가 케찹인줄도 모르고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빅맥이 꼬박꼬박 받아오는 연애편지와 초콜릿을 몰래 즐기며 행복하게만 살았다는 것이다.표면적으로는 그 이유를 귀와 코에 거는 물체가 그저 무겁고 귀찮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대부분의 청소년기를 흘려보냈다. 그때는 마치 잔잔한 수면 밑에 작은 새우가 커다란 가물치의 입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듯이 내 스스로가 내 안의 어떤 기억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고자 하는 것임을 좀처럼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은 발생했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집에 혼자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 형 또래의 친구들과 마주쳤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히 길을 걷는 내게 “너희 형은 잘 생겼는데 너는 왜 그렇게 못생겼냐!”며 계속 뒤를 쫓아오며 놀렸다. 어쩌면 그냥 흘려버릴 수 도 있었을 텐데 웬일인지 그날은 마음이 너무 아팠다.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쇄골이 부러져 울면서 집으로 돌아 갈 때도, 식중독에 걸려 밤새 구토와 설사를 할 때도 그만큼 아프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날이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안경을 벗어버렸다. 안경을 쓴 모습이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끼기 보다는 그 것을 통해 거울 속 또렷한 현실과 마주하는 게 정말이지 싫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나는 나쁜 시력을 반대로 활용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흐릿한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는 온통 피부미인들만 살고 있어 너무나 행복하다. ‘듣기 싫은 소리는 귀를 틀어막을수록 더 잘 들리기 마련이다’란것을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잘 보이지 않는 다는 특권이 여러모로 편리하다는 것을 살아갈수록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인생의 어떤 시기이든 ‘스스로를 사랑 하는가?’ 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한 것 같다. 나쁜 시력조차도 사랑하면 행복해지기 마련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빅맥을 칼로리만 높은 정크 푸드로 보듯이, '케찹이 없는 햄버거 가게? 그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나 청년이 된 어느 날, 완전히 말라버렸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창밖의 비처럼 이유도 모르는 체 끊임없이 흘러내렸던 적이 있었다. 한참을 울다 그친 후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바라본 내 자신은 모든 측면에서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지만 예전만큼 부끄럽지는 않았다. 정말이지 말갛게 헹구어진 눈으로 바라본 내 자신은 좀처럼 혼탁하지 않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내가 가진 모든 것들, 작은 신체 한 구석에서부터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마음의 숲속 비밀의 나무들 까지, 이 모든 것을 받아드릴 수 있는 준비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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