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는 것, 다시 산다는 것
[김양중/한겨레의료전문기자]
그의 집을 나서면서 저절로 하늘을 쳐다보게 됐다. 마침 가을에 막 접어들었을 때라 하늘빛이 좋았다. 그날 인터뷰한 홍순본 씨도 적어도 하루 한 번은 하늘을 쳐다본다고 했다. 저녁이 가까워진 시간이라 햇볕도 따갑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일찍 준비한 집이 있었는지 구수한 밥 냄새가 나기도 했다. 동네 꼬마 녀석들은 술래잡기를 하는지 언덕길을 잘도 뛰어 다니고 있었다.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비탈진 언덕길을 내려가는 발걸음은 파란 하늘에 몇 조각 걸친 구름이라도 밟는 듯 했다.
몸을 맘대로 움직이지 못해 짜증도 많아졌고, 요구 사항도 많았다. 하지만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에 부인 정씨가 수술을 받았을 때 불평 한마디 없이 극진히 보살폈던 남편이기에, 이제는 ‘내 차례구나’ 하면서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숫자와 한글도 다시 가르쳐야 했다. 4년 넘게 가르쳤지만, 여전히 말은 하지 못했고 글쓰기도 원활하지 않았다. 그러다 이들 부부는 간단한 그림으로 의사소통을 하게 됐다. 이것이 홍 씨가 아마추어 화가가 된 계기였다. 홍씨는 그림으로 먹거나 마시고 싶은 것을 그렸고 필요한 의사표현도 했다. 그러다 그림 그리기가 익숙해진 것이다. 원래 건축설계사를 했으니 성격은 다르지만 그림에는 다소 소질이 있었다고 해야 하나?기자로서 보람을 느끼는 날은 기분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이다. 그날 만난 홍 씨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마추어 화가였다. 인터뷰 당시에는 10여 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말도 하지 못하게 됐고, 오른 팔과 다리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오른쪽 편마비가 있었다. 논리적인 사고도 못하게 됐고, 기억력도 현저하게 떨어졌다. 심지어 1부터 10까지 숫자를 써도 4와 7은 빼놓고 쓰기도 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에만 해도 건축설계사로 일했던 그였다. 세밀한 작업에 능숙했고, 이 때문에 공사를 총괄해 맡는 등 회사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부인 정호희 씨는 “일에만 빠져 지내던 것이 뇌졸중의 원인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토록 명석하던 남편이 말도 못하고 숫자도 제대로 못 쓸 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고 말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짜증도 크게 줄었다. 붓을 다루는 손놀림도 점차 빨라졌다. 이에 정씨는 그림을 좀 더 체계적으로 배우게 할 요량으로 미술학원도 다니게 했다. 점차 불편했던 오른 쪽 다리에도 힘이 붙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씨가 함께 다녔지만 인터뷰 당시에는 버스 등을 혼자 타고 미술학원에 다녔다. 오른손이 불편해 그림은 계속 왼손으로 그렸다. 그림 실력도 좋아졌다. 아마추어 전시회에 출품해 수상 경력도 많아졌다. 정씨는 “뇌졸중으로 맘 상해하던 남편이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삶의 희망을 발견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희망 찾기에는 부인의 칭찬이 큰 힘이 됐다. 정씨는 “남편이 과일을 그렸으면 ‘정말 먹음직하다’는 말로 그림에 대한 관심을 표현합니다. 칭찬을 들으면 남편이 너무 좋아 뛸 듯이 기뻐합니다.”고 말했다.
결혼 30주년 때는 아내를 모델로 초상화를 그렸다. 남들은 결혼 30주년이라면서 여행도 간다는 투정을 부린 것이 통했다. 부인 정씨가 선물 하나 해 달라고 했더니 부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을 서화아카데미에 출품했더니 금상을 받았다. 정씨는 남편 이름으로 그림 전시회를 열었으면 한다는 작은 소원이 있다고 했다.
기사를 쓴 뒤 2달 뒤에 평소 홍씨가 다니던 강북삼성병원 로비에서 전시회가 열렸다. 그들 부부의 감격스러운 얼굴은 보지 않았어도 상상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 기능을 대신 하나 보다. 그리고 그 잇몸의 새 기능을 알았을 때 솟구쳐 올라와 막을 수 없는 기쁨이 생기나 보다. 다시 태어나는 것, 다시 산다는 것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사는 혹은 태어나는 과정에 참여하고 지켜본다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이고 보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양중 한겨레신문 의료전문기자 himtra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