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으로 읽는 세상
[송경태/전주시각장애인도서관 관장]
알싸한 물비린내가 코끝에 감돌더니 어느 샌가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창밖에서 빗물 타닥대는 소리가 흘러 들어와 방안의 커피포트 물 끓이는 소리와 한데 어우러져 귓속으로 파고든다. 나는 행복한 화음을 들으며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녹차 잎을 몇 개 띄웠다.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한 모금 마시니 은은하고 감미로운 향기가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나는 차를 마시며 창밖으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지난 여름에는 비가 내리면 개구리들의 합창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는데, 그놈들은 지금쯤 땅 속 깊은 곳에 몸을 묻고는 길고 긴 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 나는 그놈들의 잠꼬대라도 들릴까 하여 귀를 쫑긋 세워 보았으나 동면의 얼어붙은 대지 위로 매서운 바람만 생생 분다. 그렇게 계절의 변화가 가져다주는 자연의 신비에 경이를 느끼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손전화가 울려와 정적을 흔들어 깨웠다.
얼마 전에 출간한 나의 자전적 에세이와 시집을 지인에게 선물했는데 잘 읽었다는 전화였다. 그것도 안약까지 넣어가며 읽었다 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의원님, 보내주신 책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눈에 피로감이 몰려와도 책을 놓기가 싫어서 안약을 넣어가며 오랜만에 끝까지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학창 시절에 한 손엔 책을 들고 다른 손엔 안약을 쥐고 독서에 몰두했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이었는데 그 내용이 내 마음을 어찌나 저리고 아프게 하던지, 그 여자들의 인생이라는 것이 소년에겐 또 어찌나 흥미진진하던지 나는 책을 놓지 못하고 뻑뻑해진 눈에 연신 안약을 넣어가며 책장을 넘겼었다. 책에 발이 달려서 도망을 가는 것도 아니고, 내일 다시 책장을 펼칠 수 있는데도 그땐 왜 그리 조급하게 굴었는지 모르겠다. 남달리 왕성했던 독서욕 때문이었으리라.
시력을 잃은 후엔 두 눈에 안약을 넣으며 책을 읽은 기억은 없다. 눈 대신 검지 손끝으로 오돌토돌한 돌기점자를 읽기 때문이다. 대신 손끝에 윤활유를 묻히곤 한다. 오랜 시간 점자를 훑다보면 손끝이 무디고 뻑뻑해져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 손끝에 윤활유를 조금 묻혀주면 부드럽게 읽어나갈 수 있다. 그렇다고 기계에 사용하는 실제 윤활유는 아니다. 그런 걸로 책을 문질렀다가는 귀하디 귀한 점자도서의 생명이 순식간에 다할 것이다. 내가 점자도서를 읽을 때 사용하는 윤활유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는 천연윤활유다. 젊은 날 책을 읽으며 사용했던 안약 대신 이제는 손끝이 뻑뻑해질 때면 이마 위의 분비물을 살짝 묻히곤 한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 독서의 행위는 힘든 육체노동을 동반하는 일이다. 차디 찬 점자책을 손끝으로 읽다보면 손끝에서부터 팔과 어깨를 지나 머리끝까지 냉혈증과 같은 마비감이 온다. 그럴 때마다 찬 기온에 둔감해진 손끝을 입가로 가져가 호호 불어대며 독서를 해야 한다. 또한 팔과 어깨와 경추를 시시때때로 마사지해 주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 글을 쓰는 게 고혈을 짜내는 일이라면 책을 읽는 것은 이마에서 기름을 짜내고 손끝부터 팔과 어깨와 머리끝까지 시리고 저린 곳을 두드리는 일이다.비장애인에게 독서는 그리 힘든 육체노동이 아닐 것이다. 추운 겨울날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가에 앉아 침 묻힌 손끝으로 책장을 넘긴다거나,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바닷가의 파라솔 그늘 아래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책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풍경 등은 육체노동의 풍경이 아니다. ‘비장애인에게 독서란 여유로운 휴식일 것이다.
그래야 책 한권 무사히 읽을 수가 있다. 이쯤 되면 나에게 독서란 정신노동이라기보다 육체노동에 가깝다. 하지만 그런 고된 육체노동을 감수하면서 얻는 정신적 희열과 성취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크기에 오늘도 나는 검지를 세우고 독서삼매경에 빠져든다.
“저의 책을 안약까지 넣어가며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저도 어제 손끝에 천연윤활유를 묻히고 팔과 어깨와 머리를 두드리며 소설책을 한 권 읽었답니다.”
글 : 송경태 (전주시각장애인도서관 관장, 전주시의원, 시각1 급)
- 송경태 관장 약력
1961년 전북 오수에서 태어났다. 전주 비전대학을 졸업한 뒤 군에서 수류탄 폭발 사고로 시력을 상실했다. 시각장애인이 된 후 점자를 익혀 다시 대학에 들어가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2000년 '올해의 장애 극복상'을 수상했으며 2004년에는 '대한민국 신지식인'에 선정되었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세계 4대 극한 마라톤 대회를 완주하여 장애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