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에서 배운 나눔, 이제 습관이 됐어요!
네팔에서 배운 나눔, 이제 습관이 됐어요!
-네팔 미소원정대 최연소 대원 박창희 후원자 이야기-
>>네팔 남체바자르(해발 3,500m)에서
치과진료봉사중인 박창희군.
네팔의 산간오지 주민들의 치아건강을 위해 1월 22일부터 29일까지 7박 8일간 엄홍길 대장을 비롯해 모두 30명의 대원이 참가했습니다. 박창희 군은 그때 참가한 대원중 최연소대원으로 발랄함과 특유의 재치로 참가대원에게 웃음을 준 친구입니다. 또한 네팔미소원정대를 다녀와서 재단에 후원을 해주었습니다.
“힘든 거 없었는데요.”
“창희야, 그렇게 대답하면 인터뷰하러 오신 분이 얼마나 당황하시겠어. 세 문장 네 문장으로 길게 이야기해야 기사를 쓰실 수 있단다. 알겠지?”
여기는 예쁜 숲과 벤치가 어우러진 운현초등학교 교정입니다. 올해 1월 네팔미소원정대에 최연소 나이로 참가한 5학년 박창희군. 창희의 유창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찾아왔는데 도통 머리만 긁적입니다. 자리를 뜨려던 담임선생님이 다시 한 번 응원메시지를 던집니다.
>>운현초등학교 교정에서 만난 박창희 후원자(가운데)
보통 해발 2500m 이상의 산에 올랐을 때 찾아오는 고산병은 산소부족과 현기증, 구토를 동반합니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착륙, 그 곳에서 경비행기를 이용해 루크라로, 다시 이틀을 걸어 도착한 해발 3445m의 고산지대 남체바자르. 숨이 헉헉 막히는 트래킹에서 창희는 늘 행렬의 선두였습니다.“창희는 체구는 작지만 매사에 욕심이 많은 아이입니다. 저 체격 어디서 에너지가 나오는 가 싶기도 해요. 그러면서도 겸손한 아이지요.”
“일행들이 많으니까 제가 늦어지면 모두에게 피해가 되잖아요. 네팔에 가기 전에 훈련 같은 건 따로 안했어요. 아빠랑 인왕산에 한번 다녀왔고 엄마는 산에서 신을 수 있는 신발을 사주셨어요.”
창희와 부모님은 평소 자원 봉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단짝 친구 제욱이가 치과의사이신 아빠와 함께 네팔로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창희도 망설임 없이 합류했습니다.
“네팔에서 남체바자르로 가기 위해 경비행기를 탔을 때는 프로펠러 소리가 너무너무 시끄러웠고요. 비행기 안에서 제욱이가 토한 것도 기억에 남아요. 제욱이는 네팔에서 돌아온 뒤 어학연수를 가버렸어요.”
>>엄홍길 대장과 선두에서 걷고 있는 박창희군.
이 시대의 초등학생에게도 사나이 우정이 통할까요? 친구 이야기를 할 때마다 창희 눈이 반짝거립니다.
얼마 전 제욱이가 잠시 한국에 들렀을 땐 “왔냐” 한마디가 서로의 인사였습니다.
하지만 네팔의 경험은 두 소년의 우정을 돈독히 다져주었고 부모님은 내년에 기회를 만들어 두 친구를 다시 만나도록 할 생각입니다.
“남체바자르의 첫 인상은 좀 실망스러웠어요. 서울은 깨끗한데 거기는 낡고 못사는 것 같았거든요. 주로 나이 많은 분들이 와서 치과진료를 받으셨고 모두들 치아 상태가 나빴어요.”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창희가 어떤 일을 했을까.
“네팔어 몇 가지를 배워서 부지런히 응용했어요. 지금은 다 까먹어서 나마스떼만 기억나요. 원래 안내하는 일을 맡았는데 나중에는 여러 가지 일을 다 했던 것 같아요.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번호표랑 약 나눠주고, 치과기구도 닦고, 석션(suction)도 하고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여서 밤엔 진짜 몸이 이상했어요.”
하루 동안 미소원정대팀이 감당한 환자의 수는 150여명. 푸르메 치과가 하루에 20명 안팎의 진료를 보는 것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수치입니다. 그 빡빡한 일정 속에서 창희는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습니다. 시키지 않는 일도 척척해내고 마치 네팔 현지인처럼 움직이는 모습에서 모두 혀를 내둘러야했지요. 혹시 고산병에 걸리지는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아팠었다는 건 고산병 때문이 아니에요. 먼 데 와서 고생한다고 어른들이 라면을 끓여주셨는데 그거 먹고 체한 거예요.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힘들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올 때마다 인터뷰하는 사람으로서 당혹스럽습니다. 어렵게 준비해간 질문들은 아이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자원봉사자 형들과 고산지대의 피로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엄홍길 대장의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어서 창희는 즐거웠습니다.
>>네팔 미소원정대 최연소 3인방으로 ‘맹활약’한 이제욱군, 이정훈양, 박창희군(왼쪽부터).
하교 시간에 맞춰 창희를 데리러 온 엄마도 창희만큼 유쾌해 보입니다.
“창희 별명이 날다람쥐에요. 제 아들이라서 하는 자랑이 아니라 정말 날다람쥐가 따로 없다니까요. 혼자서 이리저리 어찌나 잘 움직이는지 편안한 마음으로 네팔에 보낼 수 있었어요.”하교 시간에 맞춰 창희를 데리러 온 엄마도 창희만큼 유쾌해 보입니다.
창희네 가족은 이번 일로 푸르메 재단과 후원의 인연을 맺었고 다음에는 아버지도 해외 자원봉사에 합류할 계획입니다.
어떤 형태, 어떤 방식로든 창희와 함께하겠다는 부모님의 자세에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어머니가 봉사라는 단어를 언급하자 조용하던 창희가 한마디 합니다.
“저 학교에서 봉사부에요. 한 달에 두 번 학교 안이랑 밖을 다니면서 쓰레기 줍고 청소하는 봉사요. 왜 이런 걸 하나면요. 음……. 나 한 사람의 봉사가 여러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잖아요.”
더 묻지 않고 인터뷰를 마쳤습니다. 교문을 나설 때쯤엔 열두 살 소년에게 장래희망을 묻지 않은 것도 후회됐습니다. 그렇지만 틀에 박힌 질문으로 소년의 미래를 가늠하는 것은 어른의 이기심입니다. 스무 살, 서른 살의 창희가 궁금해 또 보자는 말을 하고 돌아섰습니다.
글=김진미 자유기고가 (푸르메재단 글쓰기 재능기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