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에 핀 능소화

길상사(吉祥寺)를 아시나요?


서울 한복판 성북동 골짜기에 단아한 모습을 한 작은 절입니다. 10여년 전 우연히 길상사를 알게 된 이후 가끔 머리를 식히러가는 아름다운 곳이지요.


길상사의 전신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大苑閣)입니다.


 <길상사 극락전>

당대 최고의 요정인 대원각을 운영하던 김영한 할머니가 법정스님의 글을 읽고 크게 느끼신 뒤 1987년 대원각을 기부해 길상사로 거듭난 것이지요. 술잔 부딪히는 소리, 노랫소리가 질펀했던 대원각에는 이제 바람소리, 풍경소리, 독경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법정스님은 길상사를 창건한 뒤 제법 정갈한 절로 모습을 갖추게되자 모든 것을 맡기고 인적이 드문 순천 송광사 뒤 대숲에 있는 불일암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곳에 법정스님이 기거한다는 소식이 알려져 사람들이 찾아오자 법정스님은 또다시 거쳐를 강원도 산속의 작은 오두막으로 옮기셨습니다. 현재도 이곳에 살며 ‘무소유’를 실천하고 채소를 가꾸며  ‘홀로 사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재단 사무실에 찾아온 손님을 모시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초여름의 길상사를 찾았습니다.


<길상사 능소화>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정갈하게 생기신 아미타불이 팔을 활짝 벌려서 우리를 맞았습니다. 극락전과 스님들이 수도하는 도량 사이에 예쁜 기와문이 있고 때마침 그 위로 탐스런 능소화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모든 꽃들이 춘삼월 아름다운 계절이나 선선한 바람이 부는 풍요로운 가을에 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능소화와 접시꽃은 꽃잎이 아름다워 보는 이들이 넋을 잃을까 보통 울타리안에 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꽃은 대부분 장마철 우중에 화려한 꽃방울을 터뜨립니다.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지도 못한 채 장마비 속에서 시들어가니  미인박명의 애틋함을 갖게 합니다.


다행히 초여름이지만 아직 장마나 집중 폭우가 없어서 길상사의 능소화는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절 마당에 서계신 성모님 같은 관세음 보살님께 두손모아 문안 인사드리니 기와문 위로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가 반갑게 눈인사를 합니다.


<관세음 보살상>


길상사의 이야기로 되돌아 가서 길상사를 기부한 김영한 할머니(법명 길상화吉祥華)에게는 젊은 시절 소설 같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향토색 짙은 서정시인 백석(白石)과의 사랑입니다.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시인 백석은 남녘에는 김영랑, 북녘에는 백석으로 불리울 정도로 아름다운 시어로 유명한 시인입니다.  최근에야 그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서울이 고향인 김영한은 열여섯에 집안이 몰락하자 꽃다운 나이에 가족을 위해 스스로 한성 기생 진향(眞香)이 됐다고 합니다. 가곡과 궁중무로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당시에는 드물게 수필을 발표해 일약 인텔리 신여성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미모에 시와 글, 글씨, 그림, 춤, 노래까지 못하는 것이 없이 다재다능했다니 그의 인기가 얼마나 하늘을 찔렀을까요.


스물 세살.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영한은 정신적인 스승이었던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그가 정치적인 사건으로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해 함흥감옥을 찾아가지만 면회조차 거절당합니다.


여기서 김영한은 신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합니다. 존경하는 스승을 만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함흥기생이 되면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나봅니다.


이 때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김영한 보다 네 살 많았던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의 영어교사로 있다 우연히 기생집에서 김영한을 조우한거지요.

<시인 백 석>


백석은 영한을 보고 첫 눈에 반해 그의 손을 잡고 다짐합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백석 집안에서는 아들이 기생에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키게 됩니다.


백석은 사랑과 현실속에서 고민하게 됩니다. 영한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백석의 대표적인 시<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짓게 되지요. 이 시에는 나타샤, 즉 영한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거절당합니다. 좌절한 백석은 1939년 만주로 혼자 쓸쓸히 떠나게 됩니다.


이것이 두 사람 사이의 영원한 이별입니다. 백석은 만주를 유랑하며 세월을 보낸 뒤 광복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영한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서울로 돌아간 거지요. 이것이 이생에서의 영영이별이었습니다.


백석은 그후 북한 사회주의체제속에서 핍박을 받으면 기구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과 향수에 관심이 있었던 시인 백석에게 정치체제나 이념은 의미가 없었겠지요. 당성이 부족하고 사랑타령 하는 시인이 북한체제에서 어떻게 살아갔을 지 상상이 됩니다.


백석은 1950년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1990년대 중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새롭게 밝혀졌습니다. 고통과 고난의 무게를 짐작케 합니다.


이야기를 돌려 백석을 평생 그리워한 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합니다.



<김영한 기념비>


마침내 기생으로 성공해 당대의 요정인 대원각을 운영하게 된 거지요. 김영한은 1997년 2억원을 출연해 창작과 비평사에 <백석문학상>을 제정했고 같은 해 7000여 평의 대원각 대지와 건물 40여 동 등 1천억원대의 부동산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길상사를 세웠습니다.


김영한은 현재 길상사 한쪽에 영원한 그의 법명처럼 영원한 吉祥華로 잠들어 있습니다.


죽음도 그들을 갈라놓지 못했던 숭고한 사랑을 생각하며 길상사를 나섰습니다. 그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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