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나에게 장애를 선물하지 않았다.

아직 2월인데도 몇 차례 비가 오고 나더니 왠지 햇빛도 옅어진거 같고 날씨도 쌀쌀해져 자꾸 다리가 차갑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마음은 가을의 중반에 와 있는 듯 더욱 쓸쓸하게 여겨집니다. 진짜 가을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말이죠. 저의 책중에 「신은 나에게 장을 선물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수년 전에 이 책을 처음 낼 당시 출판사 측과 제목을 정하면서 의견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맨택하고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제목을 달기를 원했지요.


그러니까 '헤르만 헤세와의 대화'라느니 '깊은 가을, 사색의 연못가에 앉아서'나 '산 깊어 비 지어내는 마을'과 같은거 말입니다. 그러나 출판사 측에서는 그런 뻔한 제목들은 서점에 가서 훑어보면 쌔고쌨다며 좀 전에 말씀 드린 그 제목을 고집했습니다. 결국 책은 그 방면에 전문가인 출판사가 의도한 이름을 달고 출간되었습니다.


그 후 호주에서 인터뷰 대상자를 만나 제 자신을 소개할 때나 가까운 장애인 친구들을 만날 때는 그 책의 표지 사진(어차피 한글로 쓰인 내용이야 그들로서는 알 수 없었기에)을 보여주며 '당신의 인터뷰 협조가 이런 종류의 책을 만들 수 있게 합니다'라며 책의 제목을 영어로 소개했습니다. 그러면 일부는 참 좋은 책이라고 의례적인 인사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몇몇은 '뭐? 장애를 선물로 받았다고" 나는 그게 선물이라면 죽어도 싫어. 만약 선물로 받은 게 장애라면 그걸 도로 신에게 돌려주고 싶단 말이야'라고 퉁명스러운 대꾸를 하기도 했습니다.


말이 그렇지 어느 누가 선물로 '장애'를 받기를 원하겠습니까. 평생을 불편하게 살아야만 하는 데다가 그러 인해 파생되는 수많은 문제들은 커다란 난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티모시 맥컬럼은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는데도 며칠 만에 그 충격에서 빠져나왔다고 말합니다.


티모시 맥컬럼은 19세 때인 1999년 2월, 성악가가 되기 위해 서부 호주에 잇는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하러 퍼스(Perth)로 떠납니다. 그 곳에서 본격적으로 성악을 공부한 후 마지막으로는 뉴욕 브로드웨이로 진출하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떠난지 3일 만에 다시 부모가 있는 고향인 빅토리아주 질롱으로 돌아옵니다. 퍼스 해안가에서 친구들과 다이빙을 하다 모래톱에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를 당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말이지요.


"사고가 난 후 자동차도, 여자 친구도, 창밖으로 공원이 내려다 보이던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2층 침실도, 브로드웨이 무대도 모두들 사라지고 말았어요. 심지어 코를 푸는 일조차 남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입니다. 사고가 일어나기 1초 전에는 이런 모든 것들이 전혀 문제가 안 되었는데 1초 후에는 못하게 된 것지요.

그는 병원으로 찾아와 성악을 가르쳐주던 담당교수의 도움으로 마침내 휠체어를 타고 뮤지컬 레미제라블과 전함 피나포어(HMS Pinafore)에 출연합니다. 그후부터는 전국을 돌며 천상의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나갑니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부드러운 미소 또한 그의 매력입니다. 그가 노래를 부를 때는 그의 반려자이며 친구인, 안내견 협회에서 기증 받은 버스터도 의젓하게 옆에 앉아 있습니다.그런데 놀랍게도 저는 제게로 다가 온 '1초 후의 삶'을 현실로 금방 받아들였어요. 제 말이 잘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 저 역시 무엇이 저로 하여금 그런 상황에서 빨리 빠져나올 수 있게 했는지 궁금해요. 사고가 난 지 며칠인가 지났는데, 마침 그날이 밸런타인데이였어요. 높은 천장에서 빙빙 돌아가는 선풍기 팬을 올려다보며 곁에서 저를 돌봐주던 간호사들을 위해 '웨스트사이드스토리'에 나오는 '마리아'를 불러주었지요. 산소마스크를 쓴 채 말이에요."


티모시에게 우리 한국에도 많은 장애인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해줄 말이 뭐 없겠냐고 물었더니 '현재 처한 상황을 두려워 말고 자신이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 것을 위해 노력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비록 사고를 당해 온 종일 휠체어에 앉아 생활하지만 계속 노래를 부를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뭐 어려운 점이 없었겠습니까. 사고를 당했을 당시에는 앞이 캄캄해서 아무 것도 없었고 노래는 커녕 숨쉬기조차 어려웠다고 합니다. 위의 근육 손상과 가슴 근육의 경직 때문에 아주 작은 소리만 골골거리며 흘러나왔습니다. 지금도 마켓에서 장을 보거나 전등스위치를 올리거나 빨래를 모아 세탁기 안에 넣거나 현관문을 열고 닫는 일들은 버스터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 그가 입원해 있던 병실의 벽면에 붙어 있었다던, 프랑스 시인 아폴리넹에르의 '두려움'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벼랑 끝으로 오너라, 그가 말했습니다.

너무 겁이나요, 그들이 외쳤습니다.

벼랑 끝으로 오너라, 그가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다가왔습니다.

그가 떠밀었을 때

그들은 날았습니다.


모를 일입니다. 그를 병원 침상에서 떠민 것이 신일 수도 있습니다. 설마하니 신이, 그것도 우리가 그토록 매달리는 신이 장애 따위를 선물로 주었겠습니까. 신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선물로 주지 않았겠지요.


<열린지평 2009 봄호에 실린 글입니다>


박일원 1995년 호주 이주, 13년째 시드니 근교인 쿠링가이에 거주 다문화 장애인 인권옹호협에서 근무, 한국 KBS라디오와 장애인신문 등에 호주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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