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신 아픈 아이들을 위해
생후 9개월. 경기의 후유증으로 연체동물처럼 목도 가누지 못하고 뇌성마비 증상을 얻은 나를 데리고 어머니는 유명하다는 한의원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셨다. 자식에 대한 지극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킨 것일까. 어느 연세 지긋하신 한의사 할아버지의 손을 거치면서 나는 점차 증세가 호전되어 목을 가누고 앉고 서며, 언어의 발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늘 내가 언제쯤이면 사람 구실을 할까 애를 태우셨다.
허영진
푸르메한방어린이
재활센터 원장
그러던 내가 어느덧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한의사가 되었다. 그것도 남들이 힘들어하는 장애아동을 치료하는 한의사다.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장애아동을 치료하면 할수록 내 안에 안타까움이 생겼다. 그것은 장애아동을 가진 부모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아이의치료를 중단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를 안고 눈물 흘리며 이곳저곳을 헤매시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이것이 내가 푸르메재단을 지원한 동기며, 어머니에 대한 최소한의 보은이라고 생각했다.
지난해 9월 어느 날, 생소한 번호가 찍히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민이 엄마였다. 푸르메재단의 한방치료를 통해 만나게 된 민이는 청각장애를 동반한 뇌병변을 앓고 있다. 민이의 쌍둥이 누나 또한 청각장애를 앓고 있었기에 꼭 고쳐주고 싶은 아이였다.
"원장님! 민이가 걸어요! 지금 학교 운동장에서 저와 함께 걷고 있어요. 흐으윽."
평소 무덤덤해 보이던 민이 엄마가 아이의 걷는 모습에 감격해 흐느끼며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가뭄 끝에 찾아온 단비 같은 소식이었다. 그간의 시름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듯했다.
동시에 어머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한의사가 된 그날 어머니의 마음이 그러하셨겠지.' 하지만 기쁨도 잠시, 장애아동 치료의 한계를 느끼며 떠나간 많은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럴수록 나 스스로 장애아동들을 치료하는 데 더욱더 전념하자고 다짐했다.
장애아동을 진료하면서 느낀 것은 장애아동의 존재 의의다. 세상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장애아동이 있다. 그러나 그 발병 원인은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고, 모든 엄마아빠가 잠재적으로 장애아동을 가질 수 있다. 어쩌면 이 세상의 장애아동은 건강한 우리 아이를 대신해서 아파하는 건지도 모른다.
<좋은생각>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