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한

'선천성'에 대한 알레르기


사람들은, 장애인은 모두 선천적으로 그렇게 타고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언론에서 나를 소개할 때도 선천성 소아마비라는 말을 많이 했다. 우리 식구들은 선천성이란 말에 무척 예민하다. 사람들은 축 쳐진 가느다란 내 다리를 만지며 이렇게 묻곤 했다. "다른 형제들은 어때요?"


방귀희

<솟대문학> 대표


엄마를 분노시키는 질문이었다. 그럴 때 엄마는 격앙된 음성으로 말했다.


"멀쩡하지요. 소아마비는 유전이 아니에요. 병균이 침입한 거예요. 귀희는 돌 전에 걷기 시작했어요. 다리가 얼마나 튼튼했는데요. 내가 그때 아파서 친척이 아이를 봐줬는데 아이를 그렇게 만들어놨지 뭐예요."

엄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도 하신 말씀이다. 엄마는 그 친척에 대한 원망을 종종 표출하시곤 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안해지시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우리 집안에서는 선천성이니 병신이니 하는 단어는 금기가 돼 있었다.


외손녀의 장애


큰언니가 결혼해서 부산에 살게 됐다. 언니는 첫째 아이를 딸을 낳았다. 둘째는 아들이기를 기대했지만 또 딸이 태어났다. 형부가 둘째를 순산했다는 소식을 전화로 알려줬다. "딸이면 어떤가. 요즘은 딸이 더 좋아. 아들은 장가가면 아무 소용없어요."라고 위로를 해주었는데 형부는 의외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조카가 체중 미달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장애의 멍에가 될 줄 몰랐다. 엄마는 장애인인 딸 때문에 언니 산후 조리를 해주러 부산에 내려갈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기 상태를 모르고 있었다. 그저 보통 아기들보다 작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언니도 둘째 아기가 생기고는 친정 나들이를 못했다. 지금부터 26년 전이니 자동차도 없었고, 약한 아기를 데리고 고속버스를 탈 수도 없었기에 만날 전화로만 걱정을 늘어놓곤 했다. 내가 둘째 조카 민아를 처음 본 것은 두 돌이 지나서였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 진단을 받으려고 2년 만에 친정나들이를 했다. 민아를 처음 본 순간 보통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언니는 미숙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저 모든 발달이 늦되는 아이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도 처음 보는 외손녀를 낯설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의 침묵은 곧 장애에 대한 예견이었다. 서울대학 병원,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소뇌증으로 인한 정신지체였다. 정신지체가 우리 집안의 일이 되리라곤 아무도, 정말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녀의 눈물

진단을 받고 나서 엄마와 언니는 한참을 울었다. 언니는 어린 딸이 불쌍해서 울었고, 엄마는 딸에게 장애라는 짐이 대물림된 사실이 한스러워서 울었다. 형제가 장애인인 가정도 있지만 이렇게 대가 물리는 상황도 있다. 엄마는 외손녀의 장애를 더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셨다. 장애의 아픔이 있는 집안에 또다시 장애가 찾아오는 것을 보면 장애는 정말 염치도 없는 불청객이다. 엄마는 딸의 장애는 부끄러워하시지 않았지만 외손녀의 장애는 부끄러워하셨다. 사람들이 "얘는 누구예요?"라고 물으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손자 자랑이 취미인 분인데 자랑할 것이 없는 손녀라 엄마는 입을 함봉하고 말았다. 아마 나에게 장애가 없었다면 외손녀의 장애를 더 감싸주셨을 텐데......


엄마는 내가 보기 민망할 정도로 민아를 따뜻하게 대하지 않으셨다. 엄마 때문에 언니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몰래 울고 나올 정도로 엄마는 외손녀를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먹을 것을 잘 챙겨 주시는 걸 보면 외손녀에 대한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정신지체 1급 장애로 소리를 꽥꽥 지르거나 다른 손자들을 괴롭히면 가차없이 야단을 치셨다.


모녀는 장애인 부모


엄마와 언니가 마주 앉으면 하는 얘기는 자신들이 죽으면 아이를 누가 돌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면 언니는 “엄마는 뭐가 걱정이야. 귀희는 똑똑해서 제 밥벌이하는데 내가 문제지. 우리 민아는 나 없으면 당장 거지 돼. 누가 나처럼 씻기고 먹이고 그러겠어.”라며 자신의 아픔을 털어놓았다.


난 모녀가 장애인 부모로 사는 것이 정말 보기 싫었다. 그래서 그런 소릴 하고 있으면 핀잔을 줬다. 난, 장애인 부모로 살고 있는 엄마와 언니를 보면서, 내 장애인 ‘지체장애’의 무게에다 조카가 겪는 ‘정신지체장애’의 무게까지 보태지는 기분이었다. 난 중복장애로 사는 셈이었다. 이것이 내가 장애인 문제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다. 나는 두 몫의 장애인 당사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나는 내 장애보다 정신지체장애에 관심이 더 많다. 왜냐하면 몸이 불편한 지체장애는 자신의 의지로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지만, 지적장애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기에 오롯이 가족의 몫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적장애인이 집안에 있으면 가족 전체가 잠시도 장애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지적장애는 자신과 함께 가족 전체가 같은 장애를 떠안게 되는 심각한 장애이다. 나는 이 심각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늘 고민하고 있다.


장애 위조

요즘 우리 사회에 학력 위조가 사회적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데 나를 비롯한 장애인들은 장애 위조라는 속병을 앓는지도 모른다. 사회생활 특히 직장을 다니다 보면 될 수 있는 대로 장애가 문제가 되지 않도록 주위에 힘든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장애 때문에 어려운 일이 생겨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생활한다. 나는 휠체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다리가 불편한 것은 쉽게 드러나지만 손마저 자유롭지 못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불편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다 내가 한 손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는 것을 보며 "어머나! 왜 한 손으로 치세요?"라고 이상하다는 듯이 묻는다. 예전에는 얼버무렸지만 요즘은 한 손밖에 못 쓴다고 솔직히 말해준다. 왜냐하면 한 손으로도 남한테 뒤지지 않게 일을 잘해왔기 때문이다.


내가 이 지면을 통해 지적장애 조카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히는 것도 집안에 장애가 대물림된 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셨던 어머니가 이 세상에 안 계시고 이제 조카들도 다 커서 그런 문제로 상처를 받지 않을 만큼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도 장애를 드러내고 적극적으로 장애인 문제를 풀어가고 싶다. 그것이 어머니의 한을 푸는 길이 된다고 믿고 있다.


푸르메재단에서 엮은 <네가 있어 다행이야>에 실린 글입니다.


방귀희


장애인 문학을 대표하는 <솟대문학> 발행인이자 방송작가입니다. 고등학교와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현재 대학에서 구성작가 실기론과 장애인복지론을 강의하며 '장애인과 관련된 새로운 관점의 콘텐츠'를 열정적으로 연구합니다. 쓴 책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 <유리 구두를 신지 않은 신데렐라>, <종이 인형의 사랑>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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