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때보다 힘차게
목적지에 도착해 엄홍길대장님은 그렇게 말을 떼셨다. "한번도 5,000미터, 6,000미터를 꿈꾸지 않았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에베레스트 정상을 꿈꾸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가슴이 뛰는걸 어쩌지를 못하였다.
해발 3,450미터에서 바라본 에베레스트는 나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것은 나완 무관하고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다. 다만 나에게 크게 다가왔던 것은 그곳에 오르려고 했던 한 사람. 집념, 어쩔 수 없던 포기와 눈물, 도전이었다. 그래서 그 분을 통해 조금 더 가까이서 무언가를 더 느끼고자 했던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얼굴, 그 표정들이 벌써 꿈만 같이 아득하다. 진료를 받기 위해 며칠을 걸어와 기다리던 사람들. 진료를 마치고 손을 모아 참마음으로 절을 하던 사람들. 마취주사기 아래서 겁먹은 표정으로 벌벌 몸을 떨던 할머니, 그 할머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시 인간이 나눌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안으면 따뜻해지고 낮아지는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열세살 딸과 아들의 손을 잡고 산을 오르던 어머니와 아버지. 고산증으로 여러 번을 토하고도 힘겹다 한번 내색 않던 아이들과 안타까움을 접어두고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던 아버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느새 발을 맞추어 걷고 있던 부부와 골짜기를 하나 넘을 때 마다 노트를 펼쳐 생명과 사랑에 대한 노래를 적으시던 목사님.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어둡지 않음을 보여주던 어린 학생들...
알 수 없는 그들의 꿈, 희망, 삶을 상상하는 건 좋은 일이었다. 서로 다른 꿈을 지녔다 해도 목적이 같은 이들과 길을 간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내가 힘들 때는 저들도 힘들리라 내가 기쁠 때는 저들도 기쁘리라! 말없이 마음을 넘나들 수 있는 건 좋은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산을 오르내릴 때마다 만나는, 머리에 짐을 가득 이고 우리가 가는 길을 비켜서서 기다리던 사람들. 셰르파족...그들은 내가 알던 인간 종들과는 조금 다른 종들처럼 여겨졌다. 내가 알던 착한 얼굴들과는 또 다른 착한 얼굴, 또 다른 겸허한 얼굴. 지구상에 존재하는 미처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종을 만나는 듯 그들의 얼굴과 행동들은 낯설고 고무적이었다. 여행에서 가장 가슴에 깊은 남은 건 그들의 얼굴들이었다.
"왜 저들은 마치 손님처럼 서 있는 거지요? 여긴 자신들의 땅이고 우리는 손님인데 마치 자신들이 손님인 냥 우리가 가는 길을 계속 비켜서는 거지요? "우리가 손님이니까요. 우리가 손님이니 아마 공손하게 맞는 걸 거예요." 하지만 내 내부에서 어떤 불편함이 피어올라 자꾸만 고개가 숙여졌다.
목적지를 30여분 앞두고 어느 산머리에서 검은 비닐에 귤을 담아 들고 우리를 기다리던 셰르파족 여인을 만났다. 우리에게 그 귤을 하나씩 나눠주기 위해 이틀을 걸어 그곳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 여인은 대장님의 히말라야 등반 세 번째 도전에서 목숨을 잃은 셰르파의 아내, 그때가 그녀는 결혼을 한지 육 개월이 채 안 되는 꽃 같은 나이였다고 한다. 산이, 삶이, 그 등반이 원망스럽기도 하였겠건만 그녀는 대장님이 히말라야를 오를 때면 꼭 그곳으로 며칠을 걸어 내려와 자신을 맞아준다고.
나로선 알지 못하는 그런 이해... 운명, 사람과 자연의 운명...
대장님은 사람은 히말라야를 오른 이와 안 오른 이로 구분된다고 우스갯소리로 말씀하셨지만 나는 그 말을 이해할 것 같았다. 히말라야를 올라보지 못한 이로서 그곳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벅찬 환희가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그것을 결코 알지 못하리라는 것을 통해 그 차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차이, 분명히 아는 것과 희미하게 아는 것의 차이. 분명히 바라는 것과 희미하게 바라는 것의 차이. 분명히 행하는 것과 희미하게 행하는 것의 차이.
얼마 전만 해도 내가 꾸는 꿈이 어쩌면 이루지 못할 큰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그 며칠 사이 나에게 어떤 것이 들어왔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은 더 큰 꿈이 들어와 버렸다. 사는 동안 끝없이 꿈꾸고, 더 크게 키우고, 그것을 쫓아 살리라고. 그것이 가장 행복한 일일 것이라고..
사람은 어제보다 나아지기를 꿈꾸고, 자신이 스스로에게 주는 격려의 힘에 업혀 살아간다. 떠날 때보다 힘차게 돌아올 수 있어 함께 한 참가자들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별 밤을 함께 해준 루시드폴에게도...
김계희(페인팅레이디 대표/그림책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