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현 씨] 몸 아픈 비장애인도 제 손으로 고칩니다.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몸 아픈 비장애인도 내 손으로 고쳐주마
(21) ‘장애인 보건소장 1호’ 김세현 광주북구보건소장
» 김세현 소장은 “시련은 극복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보건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늘 시끌벅적하다. 진료 대기실에는 초등학생 꼬마부터 아이를 업고 온 아주머니, 60대 할머니까지 환자들로 빈자리가 없다. 진료실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걸어 나온다. 그런데 걸음걸이도, 표정도 어딘가 약간 불편해 보인다.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치료를 받으러 왔나보다 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는 환자가 아니다! 흰색 가운을 입은, 이 보건소 의사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병을 고친다?’ 놀랍겠지만, 하루 100명이 넘는 환자가 그를 만나러 보건소를 찾는다. 그는 20여년간 보건소에서 의사로 일했고, 지난 2003년에는 보건소장이 됐다. ‘장애인 1호’ 보건소장이다.
광주북구보건소의 김세현 소장은 뇌성마비 3급 장애인이다. 그리 심하지는 않지만, 말할 때 발음이 어눌하고 표정도 약간 일그러진다. 누구라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비장애인 환자를 20년이 넘도록 진료하고 치료했다는 사실을 믿기는 어려울 것 같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 때문이다. 많은 환자들이 ‘김세현 의사선생님’ 에게 진료와 처방을 받기 위해 보건소를 드나들었다. 그래서 그는 “100명의 환자가 찾아와도 힘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환자 100명이 찾아와도 힘들지 않던 의사시절
» 김세현 소장의 4살 때 모습.
그는 어린 시절 다른 대부분의 장애인처럼 일상의 불편함과 주위의 차별적인 시선을 감수하면서 자랐다. 친가나 외가 쪽에 그를 빼고는 아무도 장애인이 없었는데, 고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그를 집안에 가둬놓고 키우지 않았다. 국민학생(초등학생) 때 그를 놀리는 짓궂은 아이들도 있었다. 속상했지만 그는 ‘집 앞에 와서 표정을 폈다’고 한다. 그를 집에만 가둬 키우지 않으려는 부모님에게 ‘어두운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시내버스가 없어 20여분을 걸어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것이 어쩌면 그에게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버스는 장애인에게 아무런 배려도 없기 때문이다. 김세현 소장은 고교 때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비장애인도 움직이기 힘든 만원버스에서 내려야 할 곳에 내리지 못하고 두어 정거장을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남들이 볼 때 힘들고 어렵겠다고 하지만, 나는 의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스로 장애를 의식하고 행동하면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과 노력 덕분에 중고교 시절 그는 교우관계가 좋았다. 급우들은 그를 자연스럽게 친구로 받아들였다.
문학소년에서 의사로…10년만에 의대졸업
운동하기가 불편했던 어린 시절의 세현은 운동 대신 책을 읽었다. 중고교 여름방학 때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헤밍웨이,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이름난 작가들의 명작들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그가 읽지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한 책이 한권 있었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읽으려 하다가 너무나 어려워 한 페이지를 못 읽고 돌려줬다고 한다. “책을 빌리자 사서선생님이 웃었는데, 그걸 못 읽고 돌려주니까 또 웃더라구요.” 책벌레였던 청소년기 세현의 자존심에 상처가 난 셈이었다. 그 때부터 그는 철학과 사상 서적보다는 순수문학 서적을 더 즐겨 읽었다. 젊은 시절 읽은 AJ 클로닝의 <성채>는 그가 나중에 ‘참다운 의사의 길’을 가도록 이끌어 준 책이었다.
» 전남 순천시 장천동 집에서 형님과 함께 찍은 사진. 김세현 소장이 9살 때였고 5살 많은 형님은 중학생이었다.
독서광이었던 그는 원래 국문학도가 되고 싶었다. 그에게는 공부 잘하는 형이 있었다. 여섯 살 위의 형은 60년대 말 서울공대에 입학한 수재였다. 형의 영향으로 부모님은 그에게 무조건 이과쪽으로 진학하도록 요구했지만, 그는 그 때까지 여전히 맑은 눈을 가진 문학소년이었다. 고민 끝에 ‘공부 잘 하는’ 형에게 의견을 구하고자 편지를 썼다고 한다. 형의 답장은 이랬다.
“사실은 나도 국문학과에 가고 싶었다. 소설가보다는 국문학자가 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너는 나보다 문장력이 훨씬 떨어지는데도 국문학과를 가려고 하다니.”그는 진로를 바꾸었다. 그가 의대에 진학해 오늘날 의사가 된 것은 형의 이 편지 한 장 때문이었다.
“남들은 내가 장애가 있어 이를 극복해보려고 일부러 의대에 진학했겠지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너는 문장력이 없다’는 형님의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선입관이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장난스럽게 웃는다. 이렇게 해서 전남대 의대에 입학한 그는 10년 만에 졸업모를 썼고 8년만에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격증을 땄다.
장애인 의사 못 믿겠다? 누가 환자를 아는지 내기하자!
1980년 의대를 졸업하고 민간병원 인턴에 지원했을 때다. ‘비장애인적인’ 예상대로, 장애인인 그는 두 번이나 탈락했다. 지원자가 미달된 병원에서까지 그를 거부했다. 그 때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단다. “당신들, 실수한 거야!”
시골에 내려가서 개업할까 하던 그는 의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 동구 보건소를 찾았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는 벽에 부딪쳤다. 구청에서 ‘몸이 저 모양인데 환자를 제대로 보겠느냐’며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이번에는 반발하고 나섰다. 구청쪽에 내기를 제안했다. 전국 242개 보건소 관리의사를 다 불러 모은 뒤 누가 가장 진료 잘하고 치료 잘하는지, 누가 환자 마음을 제대로 어루만져 줄 수 있는지 내기를 하자고 했다. 구청쪽에서는 별 말이 없다가 결국 그를 보건소 의사로 받아들이게 됐다.
» 1980년 대학 졸업식장에서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김세현 소장은 전남대 의대를 10년만에 졸업했다.
사실 그는 보건소에서 관리의사로 1,2년을 일하고 나와 개업의사로 나서겠다는 생각이었다. 보건소라는 곳이 주로 돈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찾는 병원이어서 그의 환자 중에도 저소득층 노인들이 많았다. 한번은 할머니를 진료하다 보건소에서 더 깊이 있는 진료와 치료가 어렵다고 판단해 다른 병원을 소개시켜 드렸는데, 며칠 후 그 할머니가 다시 그를 찾아왔다. 소개해 준 병원에서 박대받았다는 것이다.
“간호사가 그 할머니에게 약 봉지를 휙 던지면서 그러더랍니다. ‘할머니, 다음부터는 여기 좀 오지 마세요.’ 간호사도 문제고 이런 간호사를 쓴 병원장도 잘못된 것이죠. 그 다음부터는 저를 찾아온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보내지 못하겠더라구요.” 이렇게 해서 20년을 보건소 의사로 보내게 됐고 2003년에는 광주북구 보건소 소장이 됐다. 그때부터 우리나라 첫 ‘장애인 보건소장’이라는 이름표가 따라 붙었다.
김 소장은 6년째 보건소장으로 있으면서 나름대로의 보건소 운영 원칙을 갖고 있다. ‘첫째, 맡은 업무는 전국에서 최고로, 둘째,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다.’ 그가 20여년간 보건소 의사로 환자를 받아 돌보던 원칙과 똑같다. 그는 자신을 믿고 찾아와준 환자들에게 따뜻하게 대하려 노력했고, 그래서 그에게는 나이든 노인 환자가 많았다. “돈 없어 민간 병원을 찾지 못하는 가난한 노인들에게 의사로서 그는 항상 허리를 굽혔습니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보건소 직원들의 말이다.
“모든 병의 90%는 마음에서 오는 병입니다. 화가 많고 육체적, 정신적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 헐벗고 굶주림을 자주 겪은 사람들, 자식들 기르는 동안 한 맺힌 것 많은 데 이것을 풀 길 없는 사람들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에게는 일부러 화를 풀어주려 했습니다. 마음의 응어리가 풀리면 신체의 병도 사라집니다.”
장애인-비장애인의 차이는 ‘시간 더 걸린다’는 것뿐
» 지난 11월 초 전남 담양의 한 유원지에서 보건소 직원들과 단합대회를 열었다. 김세현 소장은 보건소 직원들과는 20여년 넘게 한솥밥을 먹은 식구들이다.
김 소장은 비장애인에게 종종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무엇일까? (독자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시길.) 그에 따르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는 ‘소요시간’에 있다.
“같은 일을 하는데 시간이 더 걸린다는 사실, 한 가지 뿐입니다. 비장애인이 10분 동안이면 하는 것을 장애인은 20분 동안 한다는 것이죠.”장애는 ‘시간 차이’의 문제이지 결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의대를 졸업하기 까지 10년, 가정의학과 전문의 자격증을 따기까지 8년, 보건소장이 되기까지 20여년의 시간은, 그가 만약 비장애인이었다면 더 짧아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국 그는 비장애인과 다름없이 ‘해냈다’는 것이다.
“장애인은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쳤을까’라고 생각하는데, 거꾸로 생각하면 시련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 같은 것입니다. 극복하지 못할 사람에게는 시련이 없습니다. 시련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2년 후 정년퇴임 하게 될 김 소장은 시골을 돌면서 무료 순회진료를 생각하고 있다. 도시보다 훨씬 여건이 열악한 곳은 ‘비장애인 의사’들이 찾아가지 않아 의료의 손길을 받지 못하다는 사실을 장애인 의사인 그는 잘 알고 있다.
글/김성재 푸르메재단 사무국장
■ 김세현 광주북구보건소장 약력
1951년 전남 목포 출생
1971년 광주일고 졸업
1980년 전남대 의과대학 졸업
1982년 전남 광주북구보건소 관리의사 부임
1987년 가정의학전문의 자격 획득
2003년 광주북구보건소장 취임. 전국 최초 장애인 보건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