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 한켤레
윤재근
한양대 명예교수
중학교 동창 녀석이 죽어서 문상을 갔더니 영정(影幀)밑에 낯익은 운동화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흰 국화꽃 송이들 사이에서 늙은 운동화 한 켤레가 문상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도 남았다. 그러나 문상객들은 하필이면 왜 헐어빠진 운동화 한 켤레를 놓아둔 것일까 의아해 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고인의 단짝인 나에겐 저 낡은 운동화가 영정 밑에 놓여 나의 애를 끊을 듯이 슬프게 한다.
고인의 상청에선 상주(喪主)들과 슬픔을 전하는 절만 해야지 입을 열어선 안 되는 줄 알지만 차마 입을 닫아둘 수 없었다. “여보게, 저 친구 사진 밑에 저 운동화를 놔줘서 고마워!” 상주는 그만 울음을 참지 못하고 내 손을 잡고 눈물을 주룩주룩 쏟았다. 효자 밑에 효자 난다고 효성이 지극했던 상주가 내 말에 그만 슬픔이 복받쳐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상주의 두 손을 꼭 잡고 나도 눈물로 답해주고 말았다.
우리는 고인과 한 평생 어울려 살았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고인의 어머니를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영정 밑에 놓은 운동화가 바로 고인의 어머니를 생생히 떠올려준 까닭이다.
우리 넷은 단짝 불알친구였는데 특히 중학 3년 동안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쯤은 녀석 집에 몰려가 어머니의 따끈한 쌀밥으로 배를 채우곤 했었다. 우리 넷 중에서 녀석이 제일 부잣집 자식이었다. 고장에서 알만한 정미소를 경영하고 있었으니 녀석의 집에는 늘 햅쌀 같은 쌀로 지은 밥이 밥상에 올랐었다. 쌀도 오래되면 묵은 맛이 나서 단맛도 줄고 고슬고슬한 진기도 아셔져 쌀밥이 맥없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녀석의 집에만 가면 고소하고 윤기 자르르한 햅쌀밥 같은 밥을 여름방학 8월에도 먹을 수 있었다. 그 녀석이 우리 집에 가자고 하는 날이면 나머지 세 놈은 약속이나 한 듯이 “어머니가 오랬어!” 환성을 질렀다. 녀석의 어머니는 우리 셋을 아들의 벗으로 정성껏 삼아주었고 우리도 녀석의 어머니를 깍듯이 한 평생 벗의 모친으로 정성껏 모셨다.
그날도 점심을 거나하게 얻어먹고 더위를 식힐 겸 뒷 내로 가서 녀석의 얄팍한 음모에 우리 셋도 말려들었던 사건이 50년이 훨씬 넘었는데도 생생하다며 상청 쪽을 바라보며 아쉬워했다. 그때 중학생들이 신고 다녔던 운동화는 모두 광목 천으로 만들어진 흰색에다 검정 고무 창을 댄 것들이었다. 요새로 말하면 실내화 같았다. 그런데 ‘돋베’라는 아주 질긴 천에다 두툼한 생고무 창을 댄 새로운 운동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우리 넷은 그 새 운동화를 신어 보지 못했었다. 녀석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이 광목운동화를 빨리 벗어 던져버리고 ‘돋베운동화’를 신고 싶어 죽겠다면서 멀쩡한 광목운동화를 냇물에 적신 다음 여름 햇볕에 달구어진 돌멩이로 운동화 옆구리를 벅벅 문질러댔다. 운동화를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신발이 낡아 구멍이 났다며 돋베 운동화를 사달라고 하겠다며 피식피식 웃었다. 우리 세 놈도 피식거리며 “너만 새것 신겠다고 이러냐”고 했더니 돋베운동화를 신고 너희 집에 죽 돌아다니면서 건사하게 선전해 “느네도 모두 돋베운동화를 신게 해주겠노라!”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돌아가면서 거친 돌팍에다 광목 천을 문질렀다. 얼마 안 가서 ‘광목운동화’는 닳아빠진 구멍인양 자연스럽게 낡아 터진 모양새로 그 녀석의 음모를 꾸며주었다.
방학이 끝나 등교하던 날 우리 셋은 모두 그 녀석의 풀 죽은, 의외의 모습을 보았다. 녀석의 발에는 돋베운동화는 커녕 헝겊 운동화의 구멍들을 촘촘히 짜깁기 한 기운 운동화가 신겨져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 셋은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이 짜슥들아! 두 신짝이 좌우로 똑 같은 위치에 똑 같은 구멍을 똑 같이 문질러 내놨으니 들키고 말았지.” 하며 투덜거렸다. 사실 우리 셋도 공모자 노릇을 했으니 찔끔하고 기운 운동화를 바라보고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곱게 짜깁기를 하셨던지 오히려 멋져 보일 정도로 구멍들은 고운 실오라기로 짜깁기한 어머니의 솜씨에 감탄했었다. 운동화가 낡아 헤져서 구멍이 났다며 새 운동화를 사게 돈을 달라고 했다는 게다. 찬찬히 운동화를 살피신 어머니는, “너 나쁜 놈이구나! 멀쩡한 운동화를 생으로 구멍을 내다니. 이게 어찌 낡아서 헤진 구멍이냐? 억지로 갈아서 뚫은 구멍이지. 고무신 신고 학교 다니거나 말거나 해라. 정 새 운동화 사고 싶다면 아버지께 말씀 드려라. 나는 모른다.” 현장을 본 듯이 꼭 집어나 입도 벙긋 못했노라 녀석이 실토했다. 우리도 덩달아 찔끔했다. 오늘 아침 고무신을 찾는데 어머니가 구멍 냈던 운동화를 내놓으며, “짜깁기한 실밥은 터지지 않는다. 억지로 구멍 내지 마라. 겨울 방학 전에 새 운동화 사주마.” 결국 성공한 셈이라며 어깨를 으쓱했던 저 녀석은 본래가 효자였다.
요새 마마보이라면 생떼를 써, 명품 운동화를 사서 신고야 말았을 테지만 저 녀석은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 그리고 녀석은 평생 신발을 사면 창갈이를 몇 번씩 해 가면서 낡아서 못 신을 때까지 신었다. 아마도 저 녀석 70년을 살면서 구두 세 켤레 운동화 정도로 평생을 걸었을 게다. 그만큼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살다가 제 영정 밑의 운동화를 신고 제 어머니께로 갔다.
<월간 에세이 11월 호에 실린 글입니다.>
윤재근 한양대 명예교수
1936년 경남 함양 출생,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및 동대학원 미학과 졸업, 한양대 국문과교수 등을 역임. 저서로는 <장자철학 우화><맹자 바른 삶에 이르는 길><노자 오묘한 삶의 길>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