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평 기자] 희망을 향해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희망을 향해 “플레이 볼!”


(16) 척수장애 입고 현장 누비는 한국야구의 산증인 천일평 기자


» 한국 야구전문기자 1세대로 여전히 현장을 누비고 있는 천일평 OSEN 편집인.

“저 앞에 물웅덩이가 보이는데…….”


12인승 밴 운전석 옆에 앉아 있던 나는 운전기사에게 전방 200m 가량 도로 한가운데에서 반짝이는 물을 보고

조심하라고 한마디 했다.


“에이! 저 정도 물은 괜찮아요. 날씨도 더운데 시원하게 지나갑시다.”


폭 1미터 정도 되는 물웅덩이 가운데를 지나가는 순간 승합차는 갑자기 붕 떠올랐고 나는 “어! 어!”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정신을 잃었다.


1984년 8월 12일 미국 LA 올림픽을 마치고 한국일보-일간스포츠 취재단은 귀국하기 전 3일간의 휴가를 얻었다. 미국에서 한 달 간 취재하느라 고생했으니 휴가를 준 것이다. LA에 있던 한국일보 미주본사는 도요타 밴 승합차와 운전기사까지 내주었다. 당시 한국일보 체육부 에 있던 나는 동료 기자 7명과 함께 애리조나주 그랜드 캐년에 다녀오기로 했다.


웅장한 대협곡과 소금물 강 등 대자연의 신비함을 만끽하고 다음 날 라스베이가스에 들러 하룻밤을 보냈다.

캘리포니아주의 물줄기인 후버댐의 장관을 관광한 다음 LA로 가기 전 길을 바꿔 데스밸리(Death Valley) 국립공원을 구경키로 했다.


‘죽음의 계곡’에서 당한 차량 전복사고


>> 사고 나기 직전 그랜드 캐년 여행길에서 회사 동료들과 식사를 하던 모습. 뒤편에 사고 차량이 보인다.

LA 북쪽에 위치하고 네바다주에 걸쳐 있는 데스밸리는 말 그대로 ‘죽음의 계곡’이다. 200년 전 서부 개척 시대에 금광이 발견돼 골드러시를 이룰 때 많은 사람들이 꿈을 안고 서부로 향하다가 마지막 난코스인 데스밸리에서 수십 명이 숨져간 곳이라니 호기심 많은 나는 동료들을 부추겨 한번 보러 가자고 한 것이다.


그런데 데스밸리 입구에서 경찰이 차량을 통제했다. 전날 폭우가 내려 일부 도로가 유실됐다며 다른 길을 안내했다.

통행이 가능한 데스밸리의 반쪽을 구경하고 LA로 가는 길을 택했다. 그러고 나서 한 시간 가량 달린 끝에 전날 내린 비가 고여 있는 길 한복판 물웅덩이에서 사고를 당한 것이다.


우리의 승합차는 시속 55마일(시속 89킬로미터 정도)로 달렸지만 수막현상으로 차가 미끄러져 붕 떠오르면서 길가로

튕겨져 나갔다. 뒷좌석에 탔던 일행들은 차창 사이로 기어 나왔고 안전벨트를 하지 않고 있던 나는 창문에서 튕겨져 나와 정신을 잃었다.


»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월드컵 세계야구대회에서 김응룡 감독, 이재환 코치와 함께.

헬기 프로펠러 소리에 정신이 돌아온 나는 온몸에 통증을 느끼며 라스베이가스 밸리 병원으로 실려 갔다. 몇 차례 깨어났다 까무러쳤다 반복했다. 갑자기 다리 아래쪽이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다리가 절단 됐다는 생각에 나는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들어 아래를 보니 온전하게 두 다리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다.


적은 덩치지만 건강했고 최고 신문의 기자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고 자부하던 나는 귀국하면서 세 가지를

계획했다. 한두 해 안에 해외 특파원이나 해외연수를 나가고 행글라이딩을 배우고 신학 공부를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사고를 당했으니 어쩌랴? 병상에서도 처음 한 달 간은 곧 귀국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10월이면 한국시리즈가 열리는 야구장에 목발을 짚고 나가 취재를 계속할 수 있다고 믿었다.


평생 불구 통보에 날아간 세 가지 꿈


LA 란초 로스 아미고스 병원에 입원해 있던 84년 9월 어느 날 병원으로부터 패밀리 컨퍼런스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한국인 간호사에게 무슨 모임이냐고 물었더니 나의 가족과 의사들이 모두 만나 정밀 진단 결과를 밝혀 주고 앞으로 치료 과정을 설명한다고 했다.


회의실에는 정형외과, 재활의과, 신경외과, 비뇨기과, 신경정신과 의사와 간호사 두 명, 물리치료사 두 명, 사회복지사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들은 먼저 인체 모형과 필름을 보여주며 제일 심하게 다친 척추 부위는 “흉추(T) 10번 이하 12번까지 아주 크게 박살나고 요추(L) 1번까지 다치며 중추신경을 손상 시켜 하반신이 못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 부모님과 함께 소풍을 갔던 장충초등학교 6학년 시절(오른쪽 끝). 서울고등학교 야구선수 시절 친구 황진규(소설가 황순원 씨의 아들)와 함께 백네트에서(앞).

모임 직후 나는 병원에서 가장 가깝게 지낸 미국인 물리치료사를 찾아가 다시 한 번 나의 진단 결과에 다시 한 번 확인했다. 30대 중반의 그는 한동안 고개를 숙였다가 내 눈을 들여다보더니 “너는 영원히 걸을 수 없어” 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가슴에 쇠뭉치가 콱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다시 또 물었다. 그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목발도 사용 못 해” 라고 한마디 하고 자리를 떴다.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비뇨기과 의사는 나를 찾아 와 “무엇보다 앞으로 소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큰 일 난다” 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지만 내 귀에는 앞으로 걷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웅! 웅!” 거렸고 온 몸에 힘이 빠졌다. 어느 정도 각오했지만 정작 담당자로부터 통보를 받으니까 절망감이 엄습했다. 기가 막혔다. 아내와 가족들에게 짐만 안겨준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좌절의 늪에서 꼭 잡은 희망의 손


다음 날 오전 휠체어 달리기 훈련을 마치고 병동으로 돌아오면서 물리치료사 및 환자 일행과 떨어져 혼자 출발했다.

훈련장과 병동 사이에는 자동차 전용도로가 있었고 그 위로 구름다리가 설치돼 있었다. 몇 차례 눈여겨 본 곳이다. 구름다리 중간쯤에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철봉으로 만든 다리 난간 높이가 사람 키보다 약간 낮았다. 휠체어를 고정시켜 놓고 나는 난간을 붙잡고 올라가려 애썼다. 난간 위로 올라가 6미터 아래로 떨어지면 충분히 죽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난간 위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아등바등 대며 몇 차례 오르려 했으나 실패했다. 숨을 몰아쉬며 다시 시도하려는 순간 나이 든 한 흑인 직원이 나타났다. 무얼 하느냐고 묻기에 겸연쩍게 웃으며 “운동을 하고 있다”고 둘러댔다. 죽기도 쉽지 않았다.


» 1985년 5월 직장에 복귀해 편집국에서 목발과 보조기로 걷는 연습을 하고 있다.

병실로 돌아오니 아내의 편지가 와 있었다. 편지를 가지고 떡갈나무 아래로 갔다. 아내의 편지를 읽으니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펑펑 눈물을 흘리기는 처음이었다.

아내는 서울에서 아무런 탈도 없이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다고 했다. 내가 있는 병원을 다녀갔지만 무척 보고 싶다고 내용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바우(동우)는 학교에서 아주 씩씩하게 새로운 친구들과 지내고 꽃님이(유진)는 유치원에서 가장 예쁜 아이로 소문났다고 자랑했다.


당신이 예전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해 낫게 해 줄 것이니까

치료를 마치고 빨리 돌아오기만 기원한다고 끝을 맺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 지 바보처럼 울었다. 혼자 떨어져 편지를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미국인 동료 환자 두 명이 휠체어를 타고 다가왔다. 그들은 내 등을 두드리며 “미스터 천이 해병대 출신이어서 강한 줄 알았는데 웬 눈물이 그리 많으냐”며 등을 두드리고 위로했다.


그 후 나는 두 번 다시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고 믿는 가족들이 있으며 나를 격려해 주는 주변

사람이 많은데 그들을 슬프게 만들 자살을 결코 그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기자’는 나의 천직…다시 현장 속으로


다섯 달 간 미국에서 치료하고 1985년 1월 10일 귀국했다. LA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보니 건강할 때와 엄청난

차이를 실감해야 했다. 휠체어를 타고 비행기 입구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려니 통로가 좁아 도저히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 없었다. 승무원들이 나를 안아 좌석에 앉혔다.


11시간 비행 끝에 휠체어를 탄 채 출구를 나서자 환성이 쏟아졌다. 회사 동료 선후배 60여명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이 공항에 나온 것이다. 회사 동료들은 플래카드까지 준비해 흔들어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무슨 올림픽 메달리스트냐고 동료들을 나무라면서도 목이 꽉 막혔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목동 집으로 갔다. 연립주택의 2층에 있는 집에 올라가 기다리시던 아버지와 어머니께 절을

드리려니 쉽지가 않았다. 겨우 앉아 다리를 잡아 당겨 오므리고 절 시늉을 냈다. 그리고 아버지께 술 한 잔을 따라 올렸다. 아버지는 “그래 잘 왔다. 몸 조리 잘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고 댁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옆에서 계속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셨다.


연립주택 2층인 집에 오르내릴 때마다 진땀이 나고 아슬아슬했다. 출퇴근만 해도 하루에 두 번 씩 오르내려야 하는데

아들딸까지 도와줘야만 했다. 계단이 무려 21개나 됐다. 내 몸무게가 60kg 가량이고 휠체어 중량도 20kg 가량 되는 데 보통 사람들은 도와줄 엄두도 나지 않을 것이다. 요통이 있었던 아내는 계단과 자동차에 내 휠체어를 오르내리면서 허리 디스크까지 생겼다.


아내는 결국 6년 전 수술을 받았다. 두 개가 디스크가 크게 손상돼 금속판을 끼어 넣는 8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다. 의사는 아내에게 무거운 물건을 들지 말도록 지시했으나 지금도 내 휠체어를 다루고 있다.


아내의 편지와 전화, 두 아이들의 꿋꿋한 모습이 나를 살려냈다. 근 5개월 만에 귀국해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한 달

가량 입원하고 다시 출근하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따뜻한 성원과 회사측의 배려로 나는 다시 취재 현장에 섰다.


“나는 영원한 현역이다”


» 2007년 10월 아내와 함께 프로야구 롯데 포수 강민호의 모교 취재를 위해 제주시 신광초등학교에서.

85년 봄 업무에 복귀한 지 4년여 만에 나는 체육부장이 됐고, 이어 야구부가 신설되면서 야구부장을 맡았다. 스포츠신문에서 야구부장은 실로 ‘중책’이다. 전장의 일선 지휘관과 다름이 없다. 야구부장을 맡은 6년 동안 자정을 넘어 퇴근하기 일쑤였고, 등뼈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래도 나는 다행이라고 여긴다. 일 할 자리가 있고, 그 자리에서 늙어갈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었다.


2004년 1월 한국일보-일간스포츠에서 31년만에 정년퇴직한 나는 <스포츠서울> 등에 칼럼을 쓰다가 1년 후 옛 동료들과 함께 설립한 인터넷 신문 OSEN에서 편집인으로 일하고 있다. 지금도 시즌 중 일주일에 두세 번은 야구장을 찾는 나는 평생 스포츠기자가 업인 모양이다.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휠체어를 타야 하지만, 어디든 못 갈 곳이 없고 못 할 일이 없다. 두 눈은 여전히 밝고 머리는 맑으며 무엇보다 글을 쓸 수 있는 손이 멀쩡하다. 나이가 주는 무게가 만만치 않지만 나는 여전히 ‘현역’이다. 내 인생에게 외친다. “자! 다시, 플레이 볼!”


천일평 / 인테넷 신문 OSEN 편집인


※ 이 글과 사진은 천일평 기자가 준비중인 자서전을 토대로 정리한 것임을 밝힙니다.


천일평 기자 프로필


1946년 서울 신당동 출생

1958년 서울 장충초등학교 졸업

1961년 서울중학교 졸업

1964년 서울고등학교 졸업

1966년~69년 해병대 수색대 복무

1972년 한국일보 입사

1973년 단국대학교 수석졸업

1983년 일간스포츠 체육부

1984년 미국 LA올림픽 취재 직후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

1989년~1995년 일간스포츠 체육부장 및 야구부장

1995년~2002년 일간스포츠 편집위원

2002년~2004년 일간스포츠 편집인

2004년 1월 정년퇴임

2004년~2005년 스포츠서울 칼럼 연재

2005년 9월 인터넷 신문 OSEN 편집인(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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