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오사카의 사회복지법인 ふれあい 공생회
가장 필요한 사람이 가장 먼저 복지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
일본 오사카 연수의 마지막 코스는 <사회복지법인 ふれあい共生會>입니다. ‘ふれあい’는 우리 발음으로 ‘후레아이’입니다. 만남, 접촉, 소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共生會’는 말 그대로 함께 살아가는 모임이라는 뜻이겠지요. 앞으로 ‘공생회’로 줄여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1994년 11월에 설립된 공생회는 그 다음 해에 장애인·노인 양호시설과 재택간호 지원체제를 갖춘 별도의 사회복지법인 ‘가란’을 출범시켰습니다. 여기는 가장 과학적인 재활치료 접근법으로 알려진 ‘보바스 시스템’을 일본에서 가장 먼저 도입한 유서 깊은 곳이라고 합니다.
오늘 연수 프로그램은 대부분 공생회 관계자들과의 대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시설 자체에 대한 소개보다는 양측이 고민하는 지점에 대해 진지하고 깊이 있게 말씀을 나눠보는 게 어떻겠냐는 미즈노 사무국장 등 공생회 관계자들의 제안에 따른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그 가운데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짤막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빛내자! 인간의 존엄
우선 “인간의 존엄을 빛내자”는 공생회의 모토가 멋지게 느껴져서 그 연원을 물었습니다. 뜻 밖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문구였습니다. ‘인간의 존엄’이라는 표현은 1922년 일본 전역을 뜨겁게 달궜던 수평사(水平社) 운동의 선언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수평사 운동이란 백정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 대항한 일본 근대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이라 할만한 사회운동입니다. 문득 ‘우리나라에도 형평사(衡平社) 운동이 있었지’ 하고 생각이 나실 겁니다. 맞습니다. 우리 형평사 운동은 바로 일본 수평사 운동에 영향을 받아 1923년 시작됐습니다. 30년대까지도 두 단체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백정 같은 천민들이 사는 곳을 ‘부락(部落)’이라고 했다고 합니다.우리는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마을’이라는 뜻으로 쓰는 이 말이 사실은 천민 거주지역을 뜻하는 일본어입니다. 수평사 운동의 핵심은 바로 ‘부락 해방운동’입니다.
차별 받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의 문제, 즉 ‘피차별 부락’ 문제는 일본사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권 현안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물론 수십 년 동안 정부와 자치단체가 팔 걷고 나선 덕에 수도와 전기가 들어오고 공동화장실이 없어지는 등 외형적 차별은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아직도 ‘부락’ 출신자들과는 결혼을 꺼리는 등 차별의 잔재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고 하니까 일본분들이 무척 놀라고 부러워했습니다.
‘천민 해방운동’이 키운 공생회…지금은 순수 복지법인 정착
역사적 배경 설명이 길어진 이유는 공생회가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일본 오사카의 ‘부락 해방운동’ 대상지역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생회 관계자들은 이 시설이 있는 곳이 바로 부락 내 초등학교가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부지뿐만이 아닙니다.
사실 공생회는 부락 해방운동 단체들이 출연한 기금을 바탕으로 세워진 단체입니다. 이제 일제시대 수평사 이야기가 오늘 공생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으시겠지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면 공생회는 차별 받는 천민 출신들을 위한 사회복지단체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무국장인 미즈노 씨는 공생회와 부락해방운동은 이제 아무 관계가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우리 공생회가 부락해방동맹 ‘야타’의 기금에 힘입어 설립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업의 운영에 있어서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습니다. 복지 서비스는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이 가장 먼저 혜택을 입어야 합니다. 단지 이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공생회의 복지 서비스를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단체를 세운 토대가 됐던 지역적 특성과 의료복지 서비스의 공정한 배분이라는 두 가지 큰 축이 충돌하게 되면서 마찰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공생회가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가장 먼저 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원칙을 천명했을 때 지역주민들과 단체들의 반발도 없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 ‘원칙’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일본 사회와 시민의 성숙도를 엿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면 조금 무리일까요? 아무튼 조금은 놀라운 측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복지사업은 독립성과 공정성이 생명”
“기업이나 종교단체 등 순수한 복지 서비스 이외의 성격이 개입할 경우 ‘필요한 사람 우선’이라는 우리의 원칙이 흔들립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체의 요소를 거부합니다. 공정성이 생명인 사회복지 사업에 있어서 자칫 ‘독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생회는 장애인과 노인에 대한 공정한 복지 혜택 배분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는 접근을 일절 거부함으로써 사업의 이념을 지켜가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십 수년째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운동이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일본, 그것도 인권운동의 중심이라고 하는 오사카의 대표적인 사회복지법인 다운 측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생회 나름의 고민도 없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운영하는 시설들의 주된 재정적 토대는 국가와 자치단체의 지원, 다시 말해 복지예산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경제성장에 따른 복지예산 증액에만 얽매여 있을 것인지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복지사업의 순수성과 공정성을 지키는 것과 재정적 외연을 넓힘으로써 한층 다채로운 사업을 펼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 사이에 과연 통합 불가능한 괴리가 존재하는 것인지 의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최근 일본에서 부각되고 있는 ‘국가 또는 자치단체의 지원-시장원리에 따른 기업의 사회공헌-성숙한 시민의식에 바탕한 자원봉사’가 결합한 새로운 모델이 주목되는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대목입니다.
“정부예산 ‘해바라기’ 이제 그만”…새로운 모델 탐색
3시간이 넘는 대화를 통해 연수단은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회복지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깊은 이해와 오랜 노력, 그 순수성과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철저한 원칙주의,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진지하고 새로운 모색……. 푸르메재단이 한국사회에 제시할 재활전문병원의 새로운 모델을 구축해나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얻은 것 같았습니다.
공생회 관계자들 역시 푸르메 재활전문병원 건립소식에 큰 관심을 기울이며 앞으로 그 추이를 주목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시설 견학과 함께 사회복지 실무자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더 자주 마련함으로써 그들의 노하우와 역량의 진수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정착되기를 기대해봅니다.(끝)
글=정태영 푸르메재단 팀장 / 사진=이재원 푸르메재단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