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 선 장애인 캠페인] 방귀희 씨, 내일은 푸른 하늘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⑦ ‘처음으로 대학 졸업한 휠체어 장애인’ 방귀희씨
“나도 이렇게 노력하는데 당신은 왜 포기하나요?”
» 스튜디오에서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 방귀희 씨.
1981년, 한 대학의 수석 졸업자가 출연한 라디오 방송. 진행자가 초대 손님과 얘기를 나누던 중 질문을 던졌다.
“휠체어를 타고 대학을, 그것도 수석으로 졸업하다니 참 대단하네요. 그런데 지능에는 문제가 없나요?”
상식에서 벗어나는 정도를 넘어 상대방에 대한 모욕이었다. 스튜디오는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은 출연자가 벌컥 화를 내기라도 하면? 그때 초대 손님이 입을 열었다.
“지능이 낮은 사람이 어떻게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할 수 있겠어요? 제가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지만, 그건 지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답니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상대를 몰아세우지도 않았다. 갓 대학을 졸업한 앳된 출연자는 또록또록한 목소리로 신체장애가 지적 능력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방송이 나간 뒤 ‘그 똑똑하고 말 잘하는 여학생’에 대해 묻는 전화가 빗발쳤다. 방송의 위력을 실감한 그는 방송국에서 일할 기회를 찾다가 작가가 되었다. 라디오 출연 전까지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있는지도 몰랐던 방귀희(50) 씨는 이렇게 사회에 첫 발을 디뎠다.
왜 자판을 한 손으로 치세요?
» 20대 젊은 시절 친구들과 함께 MT에 간 방귀희 씨(오른쪽). 한국 ‘대졸’ 휠체어 장애인 1호가 된 방귀희 씨.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왼쪽)
그로부터 27년. 방귀희 씨는 지금도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다. 특히 KBS 3라디오의 <내일은 푸른하늘>은 그의 분신과도 같은 프로그램이다. 졸업 후 곧바로 이 프로그램의 작가로 일하기 시작해 올해로 27년째다.
다른 프로그램도 많이 썼지만, 대표적인 장애인 프로그램인 <내일은 푸른하늘>만은 놓지 않았다고 한다. “너무 욕심이 많다고 할지 모르지만 <내일은 푸른하늘>은 30년을 채우고 싶어요.”
얄밉다 싶을 만치 똑 부러지는 말투에 생글생글 짓는 웃음 때문일까,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마주 대하면서도 그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기 힘들다. 이런 느낌 자체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일 수 있겠지만, 그런 편견을 가진 사람은 한 두 명이 아닌 모양이다.
방귀희 씨가 오른손만 사용해 컴퓨터 자판을 치고 있으면 “어? 왜 자판을 한 손으로 치세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그가 왼손을 거의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주 만나는 이들도 눈치 채지 못한다. 방귀희 씨가 굳이 숨겨서가 아니다. 보는 사람의 눈길이 장애인이라는 사실 보다는 방귀희라는 사람의 활기찬 매력 쪽으로 절로 쏠리는 것이다.
‘내일은 푸른하늘’ 작가 27년째…‘솟대문학’ 발행인까지
» 솟대문학 기금을 지원해준 시인 구상 선생과 함께한 방귀희씨.
어찌 보면 전형적인 ‘서울 깍쟁이’ 이미지도 있지만, 방귀희 씨는 사람 관계에서도 일에서도 호흡이 길다. 지금 그의 손발 노릇을 하는 활동보조인과는 1986년 인연을 맺었다. 20년 넘게 한 사람의 활동보조인과 함께 지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가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있는 장애인 문학지 <솟대문학>도 창간 17주년을 맞았다.
<솟대문학>은 국내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장애인문학지다. 방귀희 씨는 발행인을 맡아 1991년 봄 창간호부터 한 번의 결간도 없이 이 잡지를 펴냈다. ‘돈 안 되는’ 장애인문학지를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발간했다는 것 자체가 큰 성과지만, 방귀희 씨의 꿈은 여기 머물지 않는다. 시인 구상 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 쾌척한 솟대문학 기금 2억 원을 바탕으로 장애인문학재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중증장애인 대부분이 하루 종일 방 안에 갇혀 살고 있잖아요. 재단에서 원고료를 지급해 장애인 문학가들의 생활 방편을 마련해주고 싶어요.”
문학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길인 사람들, 그는 그런 장애인에게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 일할 기회가 주어지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도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세금을 내는’ 사람이 되어야 떳떳하다는 것이다.
“학교에 보내주지 않을까 두려워 죽어라 공부”
» 교수로 재직중인 우송대 학생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방귀희씨.
방귀희 씨에게 장애는 처음부터 주어진 전제 조건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한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죠. 다리는 전혀 움직일 수 없고, 왼팔도 마찬가지에요. 글을 쓸 때는 오른손으로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립니다. 밥을 떠먹을 수는 있지만, 문을 돌려 열기라도 하려면 힘에 부치죠.”
그래서 더더욱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어머니 등에 업혀 학교에 다녔고, 학교에 보내주지 않을까 무서워 죽어라 공부에 매달렸다. 장애인 입학을 거부하는 명문 규정이 버젓이 존재하던 시절에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방귀희 씨는 자신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대학을 졸업한 휠체어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수석 졸업 이상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엔 전문직업인으로 열심히 일했고, 지금은 그 성과를 인정받아 대학에서 구성작가실기론과 장애인복지론을 강의하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본격적으로 공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올해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입학해 1학기 과정을 밟고 있다. 교수면서 동시에 학생인 셈이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인생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
“글쎄요, 성공의 기준이 뭘까요? 자신 있게 성공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인생을 낭비하진 않았습니다. 나는 정말 내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기꺼이 무대 위에 설 것
방귀희 씨는 지난 18대 국회의원 선거 때 한 정당의 비례대표를 신청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17대 때 중증장애인이 처음으로 국회에 진출했지요. 이제는 장애인계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에요. 학교를 마친 뒤에는 직업을 갖고, 진실하게 열심히 일하며 내 힘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장애인계를 대표할 자격이 있다고 감히 생각해요.”
방귀희 씨의 정치 입문 시도에 대한 판단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중증장애인의 역할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많은 장애인들이 그의 글을 읽고 방송을 듣고 ‘당신을 거울 삼아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전해온다고 한다.
» 방귀희 씨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희망의 작은 싹이나마 틔울 수 있다면 행복하다고 말한다.
“방송작가는 막 뒤에서 캐릭터를 창조하지만, 이제는 무대 위에 서려고 해요. 정치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든, 나 자신을 모델로 보여주는 거지요.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사람들이 장애에 대해, 삶의 고마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자극제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방귀희 씨가 이제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리고 묻는다. 그 물음이 어떤 것인지는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당신이 건강한 몸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 아시나요? 중증장애인인 나도 이렇게 노력하는데 당신은 왜 벌써 포기하나요? 장애인 성공담이 장애인인 당신에게는 더 부담스러운가요? 개인의 노력으로 모든 악조건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일까요?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깨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글=전미영(푸르메재단 사무국장)
약력
1957 서울 출생
방송작가 겸 진행자
우송대학 겸임교수
도서출판 솟대 대표
1983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석사)
1981년 동국대학교 불교철학과 수석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