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 선 장애인 캠페인] 이희아 씨, 위풍당당 그녀, 네 손가락으로 세상을 연주하다.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③ 24살 청춘 희아의 오늘과 내일



...독도 등 정치·사회 관심 많은 ‘평범한 젊은이’

..“사랑은 그 사람의 진정한 마음 알아주는 것”


하니Only



»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씨.


“연애도 결혼도 진실함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을 거예요!”


네 손가락으로 감동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 소녀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청춘의 봄내음이 가득한 24살이 됐다. 그의 애정관도 똑부러진다.


“사랑은 상대방의 외모나 돈이 아니라 그 사람의 진정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람 그 자체를 사랑하지 않으면 얼마나 불행하겠어요?”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103센티미터의 작은 키, 천진난만한 소녀 같은 희아 씨지만, 몇 마디 나눠보면 사랑, 연애, 결혼 같은 문제에 대해 주관이 뚜렷하다. 짓궂게, 하지만 당연히(?) 첫사랑을 물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피아노 학원에 다녔던 아이였다.


“제가 먼저 좋아했어요. 제가 피아노 연습할 때 다른 얘들이 놀리면 ‘너도 한 쪽 손가락이 두개 돼 볼래! 그러면 좋겠어?’라고 친구들을 혼내줬어요.”


풋사랑의 기억으로 남은 그 믿음직한 친구는 아쉽게도 전학을 가벼렸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가르쳐주었다.



» 첫사랑에 마음 설레던 무렵 희아 씨. 꽃보다 밝은 표정으로 지금껏 세상과 마주하며 희망을 전해오고 있다.


희아 씨는 간호사인 어머니와 군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임신 5개월 경 아이의 기형을 알게 되었지만 낳기로 결심했다.


희아 씨는 남들과 조금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 손가락 4개 중 관절이 있는 손가락은 1개뿐이었고 무릎 밑으로도 ‘흔적’뿐이었다. 해외로 입양을 보내자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희아 어머니는 포기 할 수 없었다.


“어린 생명이 내 옆에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어요.”


어머니는 희아 씨를 ‘하늘이 주신 특별한 선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빛이 될 아이’라고 생각했다.


희아 씨가 7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희아 씨가 음악을 통해서 행복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는 것도 힘들었다. 특히 손가락 기형뿐만 아니라 선천성 혈관장애로 뇌의 활동이 원활하지 않았던 희아 씨에게 두 손을 한꺼번에 움직여 피아노를 치는 일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 ‘하늘이 준 선물’ 희아 씨의 아기 때 모습. 똘망똘망한 눈빛에서 당차고 똑부러진 최근 모습이 읽힌다


어머니와 함께 피나는 노력…첫 곡은 ‘나비야 나비야’


희아 씨는 하루 10시간이 넘게 정말 피나는? 노력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고, 어머니는 ‘계모’같다는 주위의 말을 흘려들으며 딸을 가르쳤다. ‘주어진 조건’ 아래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꼬박 반 년을 매달려서 연주할 수 있게 된 희아 씨 인생의 첫 곡은 바로 ‘나비야 나비야’였다.


‘피아노 사랑’의 한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말다툼을 하던 친구가 던진 물건에 머리를 크게 다치면서 한 동안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없었다. 자연 몸과 마음이 지쳐가면서 문득 피아노에 대한 저항감이 밀려왔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다행히도 세간에 희아 씨의 사연이 소개되면서 온 국민의 관심과 응원을 받게 됐고, 그 힘으로 다시 피아노 앞에 앉게 됐다.


희아 씨에게 ‘피아노는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애인 같은 존재”라는 핑크빛 대답이 돌아왔다. 힘들어 못하겠다고 하면 엄마로부터 야단과 함께 매도 수없이 맞았다. 덕분에 작은 체구지만 맷집도 늘어났다.


“독도가 일본 땅? 말도 안돼!”


희아 씨는 더 이상 자신의 지난 과거, 힘들었던 기억, 장애에 얽힌 아픈 사연 같은 것들을 들추는 게 싫다. 그런 질문은 식상하다. 대답하기도 짜증난다. 지금 고민은 따로 있다.


“한국 국민으로서 우리나라에 대해 걱정이 많아요. 요즘 나라가 많이 어렵고 시끄럽잖아요. 미국산 쇠고기만 해도 문제라고 봐요. 제가 오늘도 식당에서 곰국을 먹었는데 그게 호주산인지 미국산인지 어떻게 알겠어요?”


희아 씨는 ‘우리나라 대통령이 미국에 엎드렸다’고 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독도 문제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과거를 잊자’고 말하고 왔는데 뒤통수를 맞은 게 아니냐는 거다. 답답한 마음에 일본 정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면서 꺼내보였다. 일본에 사는 지인을 통해 일어로 번역을 해두기도 했다.









대한민국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가 일본 정부에게 보내는 서한


일본 정부는 한국 섬임에도 불구하고 독도는 일본 섬이라고 주장한 역사 교과서 지침서등에 위와 같이 언급했던 내용들을 즉각 삭제하고 일본이 과거에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한국에 저질렀던 만행을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보상하라! 이 외에 인도네시아, 중국, 대만, 필리핀, 러시아, 진주만 등 세계 곳곳에 만행을 저질렀던 나라들에게도 독일처럼 즉각 반성하고 보상하라!



얼마 전에는 모 인터넷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을 공개했다. 제헌절에는 대통령께서 초심으로 돌아가서 잘해줬으면 좋겠다는 글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 때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말이 없잖아요?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 곁에 선 희아 씨. 아버지에게 딸은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이제 정치·사회 관심 많은 ‘평범한’ 20대 젊은이


사실 음악과 예술, 추억과 포부 같은 ‘말랑말랑’한 얘기만 기대했었는데……. 희아 씨의 입에서 정치, 외교의 현안들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잘못 짚었다’고 반성했다. 희아 씨는 그저 평범한 우리 시대의 청년일 뿐인 것이다.


아니다. 평범하지 않은 청년이기도 하다. 어렸을 적 희아 씨의 장래희망은 ‘애국자’였다. 지금은 ‘한국의 헬렌 켈러’다. 때로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때로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제 이웃과 사회에 이바지하고 싶다. ‘야무진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고 있는 진짜 ‘욕심쟁이’다.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작전 도중 척추를 다쳐 장애를 갖고 살게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간호사와 환자로 병원에서 만났다. 아버지에게 희아 씨는 한줄기 빛과도 같은 존재였다.


세상과 당당히 맞서는 딸의 모습이 대견했고, 딸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선율에 힘을 얻었다. 아버지는 지난 2000년 돌아가시기 전에 컴퓨터에 자서전을 남겼다.


“희아가 장애 때문에 멸시 받는 게 싫어서 밖에도 나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장애인이 되고나서 사회로부터의 멸시, 열등감에 늘 시달렸다. 희아의 모습을 보면서 그 한을 풀었다.”



» 중국 쓰촨성 대지진 구호성금 모금행사에서 피해를 당한 어린이들과 함께 한 희아 씨. 이미 활동무대를 세계로 넓힌 지 오래다.


캐나다 장애아 부모, 연주 듣고 감사의 포옹…‘희망 전도사’ 결심


희아 씨는 지금 아버지에게 드렸던 그 행복을 이 땅의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다. 나눔을 통해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입양될 뻔 했던 나라였던 캐나다에서의 연주회 때였다.


“2004년도에 캐나다에 갔었어요. 300~400석 규모의 공연장이었는데 그 때 제 공연을 보러 입석까지 가득 찼었어요.”


자신의 연주를 들었던 한 캐나다인이 “내가 장애아를 낳았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행복했다”며 안아 줬을 때 희아 씨는 음악의 힘으로 세상에 희망을 전해야 겠다고, 이 일이 평생 나에게 맡겨진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무뚝뚝한 한국사람들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연주가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한줄로 늘어서서 희아 씨와 포옹을 하길 원했다. 한 할머니는 “네가 있어서 행복하다.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다”고 희아 씨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 순간 희아 씨는 내가 앞으로 살아야갈 목표를 찾았다고 했다. 감동은 역사를 낳는다.


어둡고 그늘진 사람들을 위해서 빛이 되고 싶다는 희아 씨. 앞으로 동티모르, 아프리카, 캄보디아 같이 전 세계 곳곳의 어려운 환경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음악으로 희망의 씨앗을 퍼뜨릴 계획이다.


벌써 일은 착착 진행되고 있다. 지난 해 9월, 희아 씨의 아이디어로 ‘북측 장애인을 위한 음악회’를 열었고, 수익금으로 550대의 휠체어를 북한에 보냈다. CD와 책 판매 수익금은 북한 장애인을 위한 항생제, 의료기구 지원금으로 기부한다. 7월에는 중국 쓰촨성 지진 성금 모금을 위해 중국 충칭에서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희아 씨는 요즘 다가올 가을이 기다려진다. 9월 말부터 두 달 동안 미국 댈러스, LA, 시애틀, 샌프란시스코와 캐나다 밴쿠버 등을 돌며 연주회를 갖는다. 북미지역의 장애인들 가운데 복지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자선공연이다.


‘한국의 헬렌 켈러’를 꿈꾸며


‘장애는 불행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희아 씨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다. 특히 장애인들 스스로 불만과 절망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비장애인 역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하고 주저앉는 일이 허다하다고 덧붙인다.


“제 손가락은 네 개에요. 억지로 갖다 붙인다고 해도 열 개가 될 수는 없어요. 저는 제게 주어진 네 개의 손가락으로 최선을 다해서 연주를 해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기가 갖고 있는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희아 씨의 손가락은 네 개 뿐이다. 하지만 건반을 두드릴 수 있는 네 개의 손가락이 있어서 행복하다.


‘한국의 헬렌 켈러’를 꿈꾸는 당당한 그녀. 너와 나, 우리 모두를 향한 ‘희망의 연주’에 청춘을 걸었다.


희아 씨의 손가락은 늘 승리의 V자를 지어 보인다.


글=임승경 푸르메재단 간사



이희아씨는 양손에 손가락이 두개씩이고 무릎아래 다리가 없는 선천성 사지기형 1급 장애인으로 1985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상이군인 어머니는 다친 아버지를 치료하던 간호사였습니다. 어머니는 희아 씨가 7살이 되던 해 ‘음악을 통해 진실된 행복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피아노를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희아 씨는 하루 10시간이 넘는 피나는 노력 끝에 몇 년 지나지 않아 네 손가락으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피아노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국내 순회 연주를 마친 희아 씨는 현재 중국과 미국, 캐나다 등 세계로 무대를 옮겨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왕성한 연주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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