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광촌 아이들이 만들어낸 기적


새까만 탄광촌 입구에 제법 그럴듯한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인부들의 부지런히 손 놀림속에 건물이 제법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 공사장을 놀이터 삼은 꼬마들이 현장 물건을 만지기도 하며, 참견을 하자 마침내 한 인부가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 주인이 보면 큰일 난다! 저리 가서 놀아라" 이 모습을 본 할아버지가 중얼거렸다.


"그러지 마시요. 걔들이 주인이라오"


2007년 늦은 봄 태백시의 작은 탄광마을 철암에서 일어난 광경이다. 아이들이 주인인줄 모르고 호통 친 인부는 순간 머쓱해져서 더 이상 아이들을 야단치지 못했다. 아이들은 신나서 떠들며 참견을 계속 했고 건물은 빠르게 올라가 7월 개관식을 가졌다. 아이들은 주인이 돼서 손님을 맞고 개관식도 예쁘게 치렀다. 아이들 얼굴에는 멋진 도서관에 대한 자부심과 행복감이 가득 찼다. 이를 바라보는 주민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탄광촌에서 노동운동을 한답시고 전두환 독재정권이 한창이던 1985년도에 태백에 내려와 인권운동, 노동운동, 지역운동을 거치면서 23년이 지났건만 그 때만큼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던 것 같다.



보수적인 총회신학대를 졸업하고 탄광촌에 뛰어든 것이 무모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탄광노동자와 주민의 인권과 생존권을 위해 나름대로 작은 힘을 보탰다. 86년에는 노동자와 작은 소모임을 만들었다가 <탄광촌폭탄테러단>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군보안대에 끌려가 고문을 받다가 간신히 풀려나기도 했고, 급기야 89년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돼 1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도 했다. 수감기간은 내 인생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재충전의 시간이었고 삶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감옥 체질인지 구속되어 있는 동안 무슨 고난과 고통을 느끼기 보다는 매일매일 즐겁고 유쾌하게 보낼 수 있었다.


91년 석방되었을 때 그 많던 탄광들이 줄줄이 폐광했다. 함께 일했던 노동운동가들도 떠나갔다. 군보안대에 끌려가 고문당할 때 마음속으로 '살아나간다면 탄광촌에 뼈를 묻겠다'고 하나님께 맹서를 했기 때문에 나는 차마 떠날 수 없었다. '그래! 이왕 머무를 바에 본격적으로 지역운동에 뛰어들자'고 결심했다. 폐광으로 신음하는 지역을 살리기 위해 <광산지역사회연구소>를 만들었다. 주민주도의 지역개발을 위해 <시민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폐광지역개발지원특별법> 제정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유례없는 주민입법청원운동을 펼친 결과 <폐광지역개발지원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돼 폐광지역에 많은 개발과 투자가 이뤄지게 되었지만 97년 몰아친 IMF 외환위기는 지역경제의 회생에 찬물을 끼얹었다.


민자에 통한 지역개발사업이 무산된 대신 특별법 제정과정에서 큰 논란이 되었던 정부주도의 카지노 사업이 탄광지역의 유일한 희망이 되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강원랜드 카지노가 2000년 문을 열었다. 도박중독과 같은 극단적인 카지노의 폐해가 많이 나타나면서 사회적인 우려가 높아졌다. 폐광지역경제에 예상을 넘는 파급효과를 가져온 강원랜드는 지역주민들에게 <강원랜드 중독증>이라는 또 다른 댓가를 치르게 했다.


석탄산업은 거의 쪼그라들고 기대했던 각종 관광사업들은 폐기되거나 연기되면서 자나 깨나 강원랜드에 지역의 생존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됐다. 지방자치단체나 지역주민들은 강원랜드에 더 의존할 수 밖에 없게 됐다. 경제개발 위주의 지역발전, 그것도 카지노에 의존하는 한계 앞에서 내 고민은 깊어질 수 밖에 없었다. '카지노 목사'라는 말까지 들어가면서도 카지노를 통해서라도 지역에 보탬이 되기를 바랐지만 그 것은 또 다른 도박이었다.


철암마을 전경

태백에 내려와 20여년을 정착해서 살았던 황지를 떠나 태백시의 변두리이자 강원랜드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철암으로 이주를 결심한 것은 '카지노 없는 지역발전의 대안'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철암은 카지노의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기대도 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철암마을은 우리나라의 마지막 탄광촌이다. 탄광이 아직 몇 군데 남아 있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 새까만 탄광촌을 고스란히 간직한 마을이다. 한때 3만 명을 넘던 인구는 이제 3천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철암경제를 살리기 위해 축제도 하고 집수리사업도 하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했다. 가장 큰 바램은 탄광촌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철암의 거리를 보존해 '마을 통째로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이뤄질듯 하다가 벽에 부딪혔다. 집주인들이 가옥보존사업을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도로 확장으로 보상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보존사업을 하면 아예 보상을 못 받거나 덜 받을까 우려했다. 보존한다 해도 법에 따라 똑같은 보상을 받는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정부예산까지 확보된 철암보존사업을 결국 포기됐고 나는 철암에서 또 한번 좌절을 맛보게 됐다.


그래도 나는 철암을 떠날 수 없었다. 2003년 문을 연 철암어린이도서관이 나의 또 다른 기쁨이자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2002년 철암을 강타한 태풍 루사의 피해로 망연자실해하는 철암주민을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는데 이대부중 20회 동창을 중심으로 많은 분들이 수천만원의 큰 돈을 수재의연금으로 보내주었다. 이 성금을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하다 실업자들을 모아 <집수리지원사업단> 꾸려 실직과 수재민을 모두를 돕는 방식을 선택했다. 집수리사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성금은 계속 들어와 꽤 큰 돈이 모이게 됐다. 이 때  성금으로 철암에 지속가능한 사업의 하나로 철암어린이도서관 건립에 나선 것이다. 나로서는 자못 기대가 컸다. 그동안 지역운동, 주민운동 과정에서 많은 일을 했지만 정작 주민들의 삶속에 뛰어들어 실제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철암어린이도서관

의욕적으로 2003년 문은 연 철암어린이도서관은 한동안 한산했다. 아이들은 도서관이 세워진 배경을 알지 못했고 그전 하늘에서 주어진 선물처럼 도서관을 이해했다. 다행히 도서관 선생님들과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아이들이 점차 도서관과 친숙해지고 나아가서는 도서관이 아이들의 삶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됐다. 아이들과 소통하고 아이들이 책을 통해 인격을 형성하는 것에 모든 프로그램이 맞춰졌다. 성탄절이면 아이들이 산타크로스가 돼서 동네를 돌아다니면 성탄노래를 부르고 독거노인들에게 정성껏 포장한 선물을 전달했다. 그 모든 것이 도서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도서관에서 요리 교실을 개설해 아이들과 함께 간식 메뉴를 짜고 함께 요리를 만들어 먹었다. 단체여행을 준비할 때 교사들이 일방적으로 계획을 짜고 예산에 맞춰 진행해봤지만 도무지 재미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계획과 진행을 맡기고 예산을 지원하니 참여도가 높아지고 여행을 통해 성장하는 아이들을 확인하는 것도 큰 기쁨이 됐다. 마을 전체를 도서관으로 만들었다. 마을 어른을 강사로 초청해 행사를 진행하자 마을전체가 참여하게됐다. 철암어린이도서관의 표어는 '아이 하나가 자라는 데 마을 전체가 필요합니다'가 됐다. '아이들이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가 철암어린이도서관의 목표이자 내 목표가 됐다.


자리를 잡아가던 도서관은 2006년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무료 임대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불이 난 노래방 건물을 수리해 도서관을 개관했는데 건물주가 갑자기 나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건물을 찾지 못하면 문을 닫을 형편이었다. 한 방송국에서 방송을 전제로  건물을 지어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했고 강원랜드의 지원으로 새 도서관을 지을 수도 있었지만 처음 도서관을 개관할 때 뼈아픈 경험을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직면한 상황을 터놓고 의논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도서관을 짓겠다고 나섰다. 처음 도서관 문을 열었을 때 눈치를 보던 그때의 아이들이 아니었다. 먼저 자기 호주머니를 털기 시작했다. 도서관 입구에 작은 저금통을 세워 놓고 기부금 장부에는 이름을 차곡차곡 적기 시작했다. 100원, 40원, 290원. 기부액을 쓰는 아이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떤 기부가 가진 것 전부를 기부하는 아이들보다  빛날 수 있을까? 아이들이 기적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모은 동전만으로 100만원이 모였다. 동네 어른과 주변의 도움으로 성금이 천만원을 넘어서자 도서관건립운동은 아무도 말릴 수 없게 됐다. 마침내 아이들의 의견이 반영된 2층짜리 아담한 도서관이 기적처럼 완공됐다. 전국에 '기적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어린이도서관이 지어졌지만 철암어린이도서관이야말로 탄광촌 어린이들이 직접 만들어낸 기적의 도서관이 아닐 수 없다.


도서관이 문을 여는 날 나는 기쁨의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우여곡절 많은 20년간의 탄광촌 세월이었지만 아이들이 만든 철암어린이도서관 하나로도 나에게 충분히 위로가 됐다. 탄광촌에서 살아야할 이유이자 희망이었다. 철암 아이들도 10년, 20년 뒤 척박한 철암에서 그래도 자신들이 건립한 철암어린이도서관이 있어서 행복했다고 그래서 희망을 가졌었다고 고백하지 않을까.


철암어린이도서관은 어린이들이 우리 시대에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 그 자체이다.


원기준

총회신학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탄광촌 태백으로 내려가 노동운동을 하다 1989년 국가보안법으로 옥고를 치뤘다. <광산지역사회연구소> 설립과 <폐광지역개발지원특별법> 제정운동을 주도해 폐광지역경제를 회생시키는데 기여했다. 강원랜드 카지노가 문을 연 이후 지역발전의 대안을 찾기위해 철암으로 이주해 철암어린이도서관을 개관했다. 2006년 희망제작소에서 일하기 시작해 지역홍보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2004년부터 <따뜻한한반도사랑의연탄나눔운동>을 조직해 사무총장으로 일하면서 남북한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의 연탄을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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