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선물-아영이


아영(10)이를 처음 만난 것은 2005년 푸르메재단에서 열었던 장애인사진전시회에서였다. 그리고 올 초 거제도로 떠나는 특별한 여행에도 아영이 가족이 함께 했다. 지난 주 아영이 집을 찾았다. 아영이가 많이 아팠기 때문에 인터뷰 일정이 한 주 늦어졌다. 말도 못하고 얼마나 아팠을까, 아픈 아이를 지켜보는 부모의 심정은 어땠을까. 집에 들어서자 아영이가 작은 의자에 앉아 ‘까르르’ 웃으며 인사를 한다. 나도 손을 흔들며 웃었다.



“아영이 때문에 너무 많이 울어서 제 눈이 퉁퉁 부었죠? 눈이 안보일정도예요. 아영이가 죽다 살아난 기분이에요.”

아영이 엄마 신주련씨는 앉자마자 다시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한다.

“아영이는 좀 어떤가요?”

“많이 좋아졌어요.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아영이네 가족

다행이다.

이렇게 몇 번이고 나는 안도했다. 전화연락을 받고 많이 걱정했는데 다시 웃는 모습을 보니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바라만 보아도 행복해 지는 아이, 전아영. 전순걸, 신주련 부부는 2000년 아영이를 입양했다. 2년 전 첫째 하영(11)이를 입양한 뒤 두 번 째 아이다. 생후 1개월에 아영이를 입양했는데 6개월 후 선천성 뇌 기형 장애를 발견했다고 한다. 뇌의 3분의 1이 빈 상태로 태어난 것.


병원은 치료가 어려울 뿐 더러 몇 개월 못산다고 했다. 하지만 아영이 부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8년의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이 처음 입양을 생각했던 것은 대학교 때라고 한다. 전순걸씨와 엄마 신주련씨는 고향이 부산인 동갑내기로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대학 졸업과 함께 결혼한 이들 부부는 대전에 있는 호텔과 은행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고아원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하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마음이 통했다.


97년 IMF로 많은 사람들이 실직하고 버려진 고아들이 생기면서 전씨 부부는 입양을 결심했다. 그것도 한 아이가 아닌 둘을 말이다. 아영이는 입양 첫날 너무 울어서 아파트 주민으로부터 민원이 들어오기도 했다. 아영이 치료를 위해 부인 신씨가 홀로 서울로 올라와 6개월간 병원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아빠는 대전에서, 언니 하영이는 부산 신씨 언니네 집에 머무르며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아영이의 치료를 위해 결국 서울행을 결심했다.


아영이는 혼자 서기는 커녕, 등이 활처럼 휘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어머니 신씨는 하루 종일 안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어느 날, 아영이가 옆에 있는 봉지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고 아이가 사물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을 알았다고 한다.



늘 웃는 아이. 아영이는 다른 사람의 언어와 행동을 받아들일 수는 있지만 표현할 수가 없다. 지적 수준은 생후 30개월 정도. 지금은 크레파스를 가지고 스케치북에 낙서하는 수준이다.


요즘 아영이는 말을 못하기 때문에 주로 음성보조기구(버튼을 눌러, ‘예’, ‘안녕’이라는 소리를 내는 기구)를 가지고 논다.


일주일에 두 번은 특수교사가 집을 방문한다. 이날은 아영이도 특수 휠체어  앉아 여느 아이들처럼 수업을 받는다. 다른 날도 분주하다 일주일에 네 번 서울시립 아동병원에서 작업치료, 언어치료,물리치료,인지치료를 받는다.



“그래도 이렇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 인가요. 이마저 받을 수 없다면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아영이는 뇌의 일부분이 없는 상태로 태어나 병원에서 치료해줄 것이 없다. 작은 감기몸살과 경기도 아영이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다. 얼마전에도 아영이는 한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어머니 전씨는 아영이가 얼마나 아픈지 가슴으로 느낀다.


언니 하영이도 아영이가 아영이가 하루 빨리 낫기위해 책상 위에 기도문을 써 놓았다. "하나님!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아영이가 아프지 않고 열도 나지 않고 경기하지 않고 아픈 것 다 낫게 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하영이는 동생이 아픈 것을 표현하지 않는 속 깊은 아이다. 하영이는 피아노를 잘 쳐서 마음이 아프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훌륭한 요리사도 되고 싶다. 피아노를 잘 치는 훌륭한 요리사가 하영이의 꿈이다.



아영이 아빠 전순걸(46)씨는 한국입양홍보회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이 단체는 2000년에 설립된 민간법인으로 14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스티븐 모리슨(최석춘)에 의해 설립됐다. 현재 대전지부를 포함해 국내외18개 지부가 활동하고 있다.


←아영이 아빠

한국입양홍보회 홈페이지(www.mpak.co.kr)에는 입양 가족 중 300가정에서 매일 입양 일기가 올라오고 있다. 아영이 가족은 양육보조금으로 연간 55만원, 의료지원비로 250만원 가량을 지원받고 있다. 전보다 나아졌지만 보조금은 턱없이 부족하다. 목욕의자 하나에 300만원, 앉는 의자가 150만원 가량 하는데 아영이가 사용하는 고가의 장비는 의료보험이 적용이 되지 않는다. 치료 또한 한 병원에서 오래 받을 수 없어 다른 병원으로 옮겨가야 하는 실정이다.


지난해 국내 보호가 필요한 어린이 숫자는 8,861명, 이 중 국내입양이 1,388명, 국외입양이 1,264명이었는데 처음으로 국내 입양이 국외입양을 추월했다. 나머지 6,000명 가량은 보육원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국내입양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입양을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와 입양하는 아이의 나이차가 60세 미만이면 가능하고 미혼모도 경제상황이나 자신의 부모님이 살아서 아이를 돌보는데 도와줄 수 있다면 입양이 가능하다고 한다.



“자연도 애정을 가지고 보살피면 다시 살아 나잖아요. 병원에서도 곧 죽을 거라고 얘기했지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겠어요?


아영이가 치료받으며 하루하루 좋아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전순걸, 신주련씨 부부 친아들 현찬(19)군은 올해 9월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의대에 진학할 예정이라고 한다. 오빠는 두 여동생을 끔찍이 사랑하고 동생들도 오빠를 많이 따른다고 한다. 일산복지타운에 자원봉사를 하러 갔다가 아픈 아이들을 보며 의사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아이에게 유전자로 넘겨지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괜한 고생을 하는 것 아니냐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들 부부가 아영이의 얼굴과 재롱을 보고 있으면 고생은 사라지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감이 찾아온다고 한다.


입양홍보회 일과 아이 치료비를 위해 직장을 옮기며 생활했던 지난 8년,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때론 눈물로, 때론 기쁨으로 보낸 시간이었지만 아영이와 하영이가 품어내는 웃음은 더불어 살아가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은 많다. 하지만 실천은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 전순걸, 신주련 부부의  삶은 우리에게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아영이와 작별인사를 하는데 아영이가 웃는다  ‘더 있다 가요. 아저씨’라는 표현같다. 현관을 나서자 5월의 따뜻한 바람이 얼굴을 부딪힌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내 발걸음이 무거운 걸까?


첨부: 아내 주련에게 보내는 편지


아영이가 내 딸이 된지 만 8년이 되었다. 지난 8년의 시간들을 되집어 보면 한마디로 축복 그 자체이다. 하영이를 입양하고 난 후 가정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우리의 최선의 선택은 부모가 되어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입양한 둘째 딸 아영이......아영이는 나의 삶의 목표와 가치를 바꾸어 놓은 아이이다.


아영이의 병명을 알기까지 제대로 편안한 잠을 한 시간도 자지 못하였던 그 때, 우렁이 신랑이 되어야 했던 그 때가 뇌리에 아른거린다. 그리고 아영이의 병을 알고 힘들어 하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만났던 많은 의사선생님들의 말씀이 기억난다. 아영이의 뇌 사진을 보며 아무것도 해 줄것이 없다던 우리나라의 가장 권위 있는 신경외과 선생님과 MRI 사진을 보며 얼마 살지 못할 건데 재활치료가 무슨 소용이 있냐고 하던 그 선생님.....하지만 아영이는 우리에게 날마다 희망과 기쁨을 주며 환한 웃음을 선물하고 있다.


아영이로 인해 굵어진 팔뚝과 뚱뚱한 몸매, 퇴행성 관절염으로 삐그덕거리는 팔다리,깜빡깜빡하는 기억력, 겁이 많아 운전대 잡기도 두려워 하며 자기가 다니던 길로만 운전하는,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아영이를 안고 밀고 병원에 다니며 아영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아내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나는 우리 가족이 있기에 날마다 웃음 지으며 행복해 한다. 아영이와 함께한 행복했던 8년이란 세월, 하지만 아영이가 살아 있는 동안 함께 살아갈 날이 더 많음을 기대하며 마음껏 행복을 누리련다.세 아이의 엄마이며 나를 남편으로 선택해 준 신주련. 당신을 많이.. 아주 많이 사랑한다.


기부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