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 선 장애인 캠페인] 정유선 박사, 희망은 절대 먼저 손 내밀지 않는다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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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뇌성마비 딛고 미국서 보조공학 교수 된 정유선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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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독일에서 열린 국제 의사소통 보조기기 학회 시상식장은 수많은 인파로 넘쳐났다. 나는 이날 의사소통 보조기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에세이를 선정해 소개하는 ‘Word+/ISSAC Outstanding Consumer Lecture Award’의 수상자로 뽑혀 45분간 연설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실질적으로 학회의 하이라이트가 될 거라는 주최 측의 귀띔이 있긴 했지만 내 연설을 듣기 위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우레처럼 쏟아지는 박수갈채를 받으며 무대 중앙으로 나갔다. 무대에서 바라보니 내 연설을 듣기 위해 한국에서 오신 어머니, 나를 찾는 듯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두 아이들과 평상시처럼 침착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의사소통 보조기기를 이용하여 진행한 45분간의 강연이 모두 끝나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청중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신 흐르는 눈물을 닦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박수갈채는 무려 5분간이나 계속되었다. 쏟아지는 박수 세례를 받으며 나는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감격스러운 이 순간에 사랑하는 내 가족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이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그들에게 선물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뇌성마비 장애인 딸을 키우며 홀로 많은 눈물을 쏟았을 어머니는 이런 감격스러운 날이 준비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조금은 덜 우셨을까.
생후 9일 만에 찾아 온 시련
1970년 서울에서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난 나는 생후 9일 만에 심한 황달기 때문에 병원에 보내져 생애 첫 한 달을 병원 입원실에서 보내야 했다. 한 달 후 황달기가 사라지자 부모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물론 당시 나를 치료했던 소아과 전문의조차도 앞으로 내게 다가올 시련에 대해서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백일이 되어도 목을 가누지 못하고 두 돌이 지나도록 걷지 못하자 애가 타신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셨다. 생후 2년 4개월째가 되어서야 알게 된 내 병명은 신생아 황달로 인한 뇌성마비였다. 그 후 어머니는 뇌성마비에 좋다고 소문이 난 것이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셨다. 물리치료와 언어치료는 물론이고 앉은뱅이도 고친다는 산골짜기 도사를 찾아가 주문을 외고 온 적도 있었고, 부적 위로 자동차가 지나가야 한다고 해서 한밤중 도로변에 부적을 올려두고는 가슴을 졸여가며 지켜 본 적도 있었다고 한다. 용하다는 한의사를 찾아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빼곡하게 침을 맞힌 적도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을 어머니의 안타까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여전히 잘 걷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장애아가 있는 집은 아이를 꽁꽁 숨겨놓은 채 밖에 데리고 다니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우리 부모님은 달랐다. 어딜 가나 나를 데리고 다니셨고 집 안에만 있으면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이 된다면서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셨다. 그래서인지 난 어려서부터 무슨 일이든 직접 해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었다. 몸이 불편하니 안 해도 된다는 일도 굳이 하겠다고 나섰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렸기에 꼴등은 면했던 운동회 100미터 달리기부터 비록 ‘지나가는 사람’이나 ‘인간탁자’같은 남들이 보기에 보잘것없는 역할이라도 열심히 참여했던 성당의 성탄절 연극에 이르기까지 뭐든 하고 싶어 했다. 다른 친구들이 하는 것이라면 빠지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더 잘해내고 싶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장애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떤 일이든 더 적극적으로 도전해 넌 할 수 없을 거라는 세상의 편견을 뛰어넘어야 당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유학 초기
아버지는 어린 내게 늘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여느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하는 상투적인 당부가 아니었다. 뇌성마비 장애인인 자식이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갈 무기는 공부밖에 없다는 걸 아버지는 일찍부터 간파하고 계셨던 것이다. “유선아, 공부를 잘하면 세상 사람들이 너를 얕잡아 보지 못한다. 그래야 네가 세상의 편견과 선입견에 맞서 잘 살 수 있는 거야.” 아버지의 그런 ‘세뇌교육’ 덕분일까. 나는 공부를 참 열심히 했고 노력한 만큼 결과도 나와 주었다. 내가 공부를 잘한다는 걸 알게 되면 친구들과 선생님도 나를 다르게 보았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걷는 것도 영 엉성한 뇌성마비 장애인이라고 해서 나를 우습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게 성적표는 단순히 공부를 잘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나도 잘하는 게 한 가지 정도는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는 증명서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공부라면 누구보다도 자신 있다고 자부하던 내가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말았다. 예상치 못했던 실패에 심한 충격을 받아 힘들어 하고 있을 때 아버지께서 유학을 권하셨고 1989년 가을, 어떤 고난이 닥쳐올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난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 도착한 나는 LA시내의 노스롭 대학에서 언어연수 과정을 듣는 걸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일반 유학생에게도 그렇지만 특히 나에게는 영어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말을 할 때도 긴장하거나 여러 사람 앞에 서면 얼굴 근육이 심하게 수축되어 말이 나오지 않았는데, 하물며 영어는 첫 마디만 뱅뱅 맴돌 뿐 도무지 발음이 되지 않았다.
언어연수는 특성상 발표를 하거나 대화하는 형식의 수업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내 입은 덜덜 떨리기만 하고 단 한마디 영어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별 수 없이 옆자리에 앉은 친구의 입을 빌려 발표를 해야 했고 나중에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나는 내 입으로 직접 발표를 할 수 없다는 좌절감으로 심한 우울증까지 겪게 됐다. 이런저런 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나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입을 꾹 다물고 살자 행동반경과 인간관계마저 좁아져 철저하게 내 안에만 갇혀 살던 나날들이었다. 당시 내가 작성했던 수첩의 메모를 보면 ‘죽고 싶다, 나는 왜 장애인으로 살아야 할까, 세상이 원망스럽고 나 자신이 싫다’는 글귀가 눈에 자주 띌 정도로 암울하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죽을 만큼 힘들었던 그 시절, 그나마 내게 숨통을 틔워준 것은 조지 메이슨 대학의 입학허가서였다. 외국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부를 한다는 사실이 새로운 자극을 주었다. 영어 발표가 많지 않고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수학적 사고방식과 비교적 연관이 많다는 이유로 컴퓨터 공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는데 전공 수업 초반은 그야말로 수난의 연속이었다.
컴퓨터 자판 치는 방법조차 모를 정도였을 정도로 소위 말하는 '컴맹'이었던 내가 컴퓨터 공학과에 들어갔으니 성적은 내가 원하는 기대치에는 훨씬 못 미치게 나왔었다.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고등학교 때부터 컴퓨터 수업을 듣는 미국 학생들보다 늦게 출발했다는 조바심까지 더해져 매일 새벽 2~3시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도서관 문이 닫히면 학생회관으로 가서 소파에 앉아 공부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렇게 잠자고 씻고 먹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공부하기를 몇 달. 드디어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2년 가을학기에는 전공과목 3개와 교양과목 2개 모두 A를 받는 쾌거를 이뤄낸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지금까지도 내 생활의 신조가 되고 있는 ‘간절히 원하고 노력하면 이루어진다’ 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하기만 했던 유학생활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당당한 엄마 되려 ‘장애인 위한 보조공학’ 전공
두 번째 여름학기를 보낼 무렵 그동안 머물렀던 이모 댁을 떠나 친구와 방 두 칸짜리 아파트를 얻어 독립을 했다. 이곳에서 내 삶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인 남편 장석화 씨를 만나게 된다. 남편은 나와 함께 살던 친구의 사촌 오빠로 우연한 기회에 만나 사랑을 키워나갔다. 결혼을 앞두고 양가 집안 어른들의 동의를 얻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두 사람의 깊은 사랑과 신뢰를 확인하신 부모님은 결국 결혼을 승낙하셨고 1995년 4월,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결혼 생활 초기에 코넬 대학원에 진학해 컴퓨터 공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취업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문득 나도 엄마가 되고 싶다는 강한 갈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엄마가 된다는 건 내게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남들은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 테지만 나에게는 그런 모든 일이 두려움과 싸워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내 장애가 아이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나를 부끄럽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다른 엄마들과 다르다는 걸 잘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나는 아기 가지는 것에 영 자신이 없었다. 그런 내게 힘을 준 건 역시 남편이었다. 결혼 할 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는 내가 훌륭한 엄마가 될 거라는 확신을 주었다. 그 믿음에 힘입어 결혼 후 3년 만에 첫 아이를 낳았다.
첫 아이 하빈이는 내게 엄마로서의 삶 뿐 아니라 인생의 새로운 방향도 제시해 주었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해 석사 학위까지 있으니 컴퓨터 관련 업체에 취업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는 보다 큰 욕심이 생겼다. 보통의 엄마들과는 다르게 보다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래서 아이가 정말로 자랑스러워하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욕심 말이다. 그래서 그 동안 막연하게 생각만 했던 ‘장애인을 위한 삶’에 도전해 보기로 결정했다. 여기 저기 정보를 찾아보던 중 마침 학사 학위를 받은 조지 메이슨 대학에 ‘보조공학’이라는 교육과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조공학이란 장애인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불편함을 개선시켜주는 보조 기기나 그에 따른 서비스를 통칭하는 것으로 내가 막연하게 생각만 해오던 것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공부였다.
의사소통 보조기기로 희망을 말하다
2000년 조지메이슨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해서까지도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문제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학교에서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과묵한 학생이었다. 머릿속에 써놓은 영어 문장은 목구멍에 탁 걸려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데 식은땀은 자꾸 흐르고 그럴수록 얼굴은 더 일그러지고……. 낯선 외국인들에게 안간힘을 쓰는 내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 차라리 입을 굳게 다무는 걸 택했다. 특히나 의견들이 날카롭게 오가는 토론수업에서 내 의견을 피력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주어진 과제나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면서 한 학기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며 견뎌내는 게 나의 운명인 것도 같았다. 하지만 20년이 넘은 세월 동안 나를 가두었던 그 견고한 운명의 틀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곧 깨닫게 되었다.
박사 과정에 들어간 해 10월, 미네소타 주에서 개최된 ‘Closing the Gap Conference’라는 보조공학학회에 발을 들여놓을 때만 해도 이 날 이후로 내 운명이 크게 변화할 거라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보조공학학회에 처음 참가한 나로서는 그야말로 그곳이 신세계처럼 느껴졌다. Eye Gaze System(눈동자의 움직임을 감지해서 컴퓨터 등의 기기를 작동시키는 장치) 등 학교에서 이론으로만 배웠던 각종 기기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흥분과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흥분 속에 이리저리 움직이던 내 발걸음이 딱 멈춰선 곳은 바로 보완대체 의사소통 보조기기(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 Device) 전시장이었다. 어쩌면 여기에서 나에게 딱 맞는 의사소통 보조기기를 찾을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이 나를 들뜨게 했다.
사실 의사소통 보조기기를 사용하리라 마음먹기까지는 많은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보조공학을 전공하기 전까지는 의사소통 보조기기라는 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소통 보조기기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에도 나는 선뜻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의사소통 보조기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내 입으로 말할 기회가 완전히 사라질 것만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언어장애인들이 의사소통 보조기기를 사용하기 전에 나와 같은 딜레마를 겪는다고 한다. 그런데 보조공학을 공부하고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 많은 장애인들을 만나면서 서서히 생각이 달라졌다.
특히 보조공학학회에서 만난 한 남자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전신이 마비되어 침대에만 누워있어야 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각종 보조기기를 이용하여 누워서도 컴퓨터를 다루고 학회에 논문까지 발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면 차라리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을 하고 있던 나로서는 보조공학의 힘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는 장애인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다가왔고 입을 닫은 채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것보다는 어떤 방법으로든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전달하는 게 훨씬 현명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토론과 발표 위주의 박사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만의 의사소통 방법을 찾아내야 했고 의사소통 보조기기야말로 가장 적합한 선택이었다. 일단 수업시간에 발표를 할 때를 대비하여 긴 글을 저장할 수 있는 기능과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자판을 두드리면 곧바로 합성음이 나오는 기능이 있어야 했다. 그날 전시장에 나와 있던 여러 제품들을 사용해 보고 마침내 찾아 낸 의사소통 보조기기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티븐 호킹 박사도 사용하고 있는 Words+사의 EZKeys 소프트웨어였다. 이렇게 해서 의사소통 보조기기와 일생일대의 만남을 하게 되자 초반의 두려움은 눈 녹듯 사라지고 며칠 뒤 EZKeys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진행한 리더십 세미나 수업을 성공적으로 마치며 나는 의사소통 보조기기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내 운명이 바뀔 수도 있겠다는 한 줄기 희망을 보게 되었다.
내가 사용하는 의사소통 보조기기는 필요한 문장을 타이핑한 후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한 문장씩 엔터를 치면 합성음으로 나오는 형태다. 물론 의사소통 보조기기를 사용한 후에도 빠르게 진행되는 토론 수업에서는 따라가기 힘든 점이 있었지만 이 기기를 사용하기 전,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다른 친구들의 입을 빌어 얘기 할 때와 비교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과 다름없었다.
교수가 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내게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말씀과 함께 항상 교수가 되라고 하셨다.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이 공부였으니 나중에 꼭 교수가 되어서 독립된 인간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바람은 말 그대로 그냥 바람일 뿐 현실성은 전혀 없어보였다. 지체 장애는 그렇다 쳐도 언어장애까지 있는 내가 무슨 수로 강단에 선단 말인가. 하지만 뜬구름보다도 더 허황되어 보였던 아버지의 소망은 결국 이루어졌다.
그 날은 ‘장애인의 언어소통을 위한 보조기구에 대한 사용자들의 시각(Perspectives ofUsers of Hightech Augmentative and Alternative Communication Systems)’을 주제로 쓴 논문이 통과된 며칠 후였다. 마이크 베르만 지도교수님이 나를 연구실로 호출했다. 교수님을 찾아뵌 자리에서 나는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받았다. 학교에 계속 남아 연구도 하고 강의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저더러 강의를 하라고요? 제가 어떻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조차 절반 이상은 종이에 적어 전달해야 하는 내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 그런 제안을 하시다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유선, 넌 교수로서의 자격을 다 갖추고 있어. 전문 지식이 있지, 그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의사소통 보조기기가 있지, 그리고 무엇보다 넌 항상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좋은 성격을 갖고 있어. 학생들도 널 좋아할 거야.”
생각해보겠다며 연구실을 나선 뒤 꿈이 아닐까 해서 팔을 꼬집어보기까지 했다. 그리고 바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스티븐 호킹 박사였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스티븐 호킹 박사는 루게릭 병으로 인해 현재는 손가락 하나만을 겨우 까딱할 수 있는 상태다. 그러나 그는 내가 사용하고 있는 바로 그 의사소통 보조기기와 손가락을 까딱하는 동작만으로도 컴퓨터 작동을 가능케 하는 보조기기를 사용해 세계 각국을 누비며 활발하게 강의를 하고 있다. 그를 내 역할 모델로 삼기로 했다. 두렵지만 용기를 내야 했다. 자신 없고 두렵다는 이유로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평생을 후회하며 살지도 모르는 일이다.
첫 강의를 시작하며 열의에 찬 학생들의 눈동자를 마주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비로소 내가 강단에 섰다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발표 한 번 제대로 해보는 게 소원이었던 뇌성마비 장애인 정유선이 미국까지 건너와 대학원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게 되다니, 말도 안 될 것 같은 그 일이 현실이 되어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기적은 간절함과 집중력이 주는 선물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일이 마치 기적처럼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욕구에 집중하고 거기에 걸 맞는 계획을 철저하게 세운다면, 실행하는 힘은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횡재를 바라는 차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건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이고, 자기 주문이며, 나아가 자기 확신이다. 자신의 욕구를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그것에 집중하며 꼭 이룰 수 있다고 자신을 독려하는 과정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흘러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무의미하게 보내기 쉬운 하루하루를 작은 실행들로 채우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꿈꾸던 하나의 성과를 이룰 수 있다.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건 결코 기적이 아니다. 기적이란 무언가를 간절하게 원하고 그 고지를 향해 열심히 다가가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인생의 선물인 것이다. 앞으로 나는 얼마나 더 많은 기적을 이루어 낼 수 있을까.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평범한 진리만 잊지 않는다면, 앞으로 인생에서도 기적이라는 보물을 계속해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본다.
정리=백은영 푸르메재단 간사 ※위 글은 정유선 박사의 자서전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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