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탑클래스] 이지선 교수의 두 번째 스무 살

[조선일보 탑클래스] 이지선 교수의 두 번째 스무 살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이 지 선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 스물셋에 교통사고로 중화상을 입고 마흔 번이 넘는 수술을 이겨낸 뒤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 이화여대 유아교육과를 졸업한 후 보스턴대에서 재활상담학 석사학위를, 컬럼비아대에서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한동대학교 상담심리 사회복지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제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일 때,

저를 향한 완벽한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어요.

그 손길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를 아니까

그 손길에 연결되지 못한 이들을 돕고 싶었어요.

병원에 있으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랐고,

그래서 공부를 해야겠구나 결심했어요."

 

“서울 한강로 1가에서 만취 상태의 운전자가 몰던 갤로퍼가 마티즈 승용차 등 여섯 대와 추돌했습니다. 이 사고로 마티즈 승용차에 불이 나서 차에 타고 있던 스물세 살 이 모 씨가 온몸에 3도 중화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습니다.”

 

2000년 7월, 뉴스 속의 ‘이 모 씨’가 있다. 매일 뉴스에서는 사건과 사고가 일어난다. 2분에서 3분여의 리포팅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 그 후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작가 이지선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가 글을 쓴 건 여덟 개의 손가락을 절단한 뒤였고 남은 엄지손가락과 마디로 자판을 두드려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했다고 했다. 스피노자가 《윤리학》에 쓴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순간 고통이기를 멈춘다”는 문장을 그는 따로 메모해두었다. 잃은 것들이 아니라 남은 것들을 바라봤다.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배우고 또 배웠다.

 

그는 소주를 다섯 병이나 먹고 운전대를 잡은 이로 인해 사고를 ‘당했’지만 일생을 피해자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사고가 일어난 그 자리, 그 시간에 멈춰서 돌아보고 안타까워하며 그 시간만 곱씹고 사는 건 더욱 원하지 않았다.

 

40만 독자가 읽은 《지선아 사랑해》로 사고 후 생존기를 전했던 작가는 이제 《꽤 괜찮은 해피엔딩》으로 이후의 생활을 들려준다. 그는 이제 사고와 잘 헤어졌고, 생존 이후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장애를 얻고 난 뒤 쏟아진 도움의 손길이 자신을 어떻게 일으켜줬는지를 잘 아는 그는 그런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길을 놓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2007년 유학길에 오른 그는 보스턴대에서 재활상담학 석사학위를, 컬럼비아대에서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2017년부터 한동대학교 상담심리 사회복지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극한의 밸런스 게임을 시작해볼까요. 영어로 논문 써서 미국 명문대에서 박사학위 받기와 한국에서 영어로 강의하기 중 뭐가 더 어렵나요.

“(단번에) 영어로 강의하기요.”

 

아, 그런가요?

“논문은 다른 참고 자료를 볼 수도 있고 오늘 하기 싫으면 내일 해도 되지만 강의는 그렇지 않잖아요. 주어진 시간은 무조건 책임을 져야 하고, 내가 모른다는 걸, 지금 땀을 엄청 흘리고 있다는 걸 들켜서도 안 되고요. 지금은 그래도 강의가 좀 익숙해져서 ‘서로 알아보고 다시 만나자’ 하기도 해요(웃음). 제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서 굉장히 유창할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저는 영어가 굉장히 불편한 상태로 어쨌든 마쳤습니다. 저처럼 꾸역꾸역 마치는 사람도 있답니다.”

 

마라톤이랑 비슷하네요. 2009년 뉴욕 마라톤에 출전했을 당시 처음엔 “10km만 가자”는 마음으로 뛰었다고요.

“비슷해요. 처음부터 완주를 생각하면 못 가지만, 이번 학기만, 방학까지만 버텨보자 하면서 가는 거죠.”

 

마라톤을 뛸 때 함께 뛴 (감전사고로 두 팔을 잃은) 김황태 씨는 “중환자실에 있었던 때를 생각하며 달려”라고 격려해줬다고요.

“힘들 때마다 생각이 났어요. 지금 이 고통이 중환자실에서 겪은 고통보다 더 힘든가. 대답은 ‘아니’였고요.”

 

7시간 22분 26초의 사투는 ‘푸르메재단’을 후원하기 위해서였지요. 지금도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고요.

“푸르메재단은 장애인이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기 위해 2005년에 만들어진 재단이에요. 백경학 대표님은 겸손 그 자체예요. 자기를 드러내지도 않고요. 그래서인지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모이죠. 두 번째 마라톤도 푸르메재단에서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을 위해 짓는 국내 최초의 재활병원 건립비 모금을 위한 것이었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건 왜 중요한가요.

“초·중·고교 교장선생님들께 장애 이해 교육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이야기를 하죠. 학교 안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친구가 되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고요. 아이들이 자연스러운 만남과 접촉하며 자란다면 분명히 사회는 달라질 거라고요. 그런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훨씬 낮아요. ‘아, 존재하는구나’ 차원이 아니라 함께 뭔가를 해보는 경험이죠. 도움을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주고받는 경험이고요.”

 

도움을 주기만 하지도, 받기만 하지도 않는.

“제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일 때 저를 향한 완벽한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어요. 그 손길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를 아니까 그 손길에 연결되지 못한 이들을 돕고 싶었어요. 병원에 있으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랐고, 그래서 공부를 해야겠구나 결심했어요. 실은 막연했어요. 꼭 박사를 해야겠다, 이런 건 아니고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았어요.”

 

이지선 박사의 공부에는 ‘장애인을 향한 비장애인의 부정적 인식과 태도’를 바꾸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죠.
“사고 이후에 여러 사람들의 반응이 있잖아요. 귀는 멀쩡한데 다 들리게 이야기를 한다든지 혀를 찬다든지요. 저를 보는 어떤 분들이 ‘나는 저런 사고를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비교 행복을 갖는다면 그건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남과의 비교를 통한 행복은 오래가지 않아요. 진짜 행복도 아니고요.”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이야기도 했지요.
“저는 불행의 조건을 많이 갖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자주 행복을 느꼈어요. 중환자실에서 처음 마신 물의 시원함을 기억해요. 물 한 모금을 마시는 일이 ‘살아 있다’는 행복을 알려줬죠.”

 

전작에서는 잃어버린 것들을 통한 통찰을 알려줬습니다. 이를테면 “속눈썹이 없어지고 나니 속눈썹이 왜 있어야 했는지를 알았다”고 했죠. 지금은 없어진 기능들이 복구되면서 그 기쁨을 전해주고 있어요. “콧물이 흐른다!”처럼요.
“콧물이 흐른 건 20년 만의 일이었어요. 방학 때마다 수술을 받았는데 목과 오른손에 피부 이식을 하면서 왼쪽 콧구멍 내부를 넓히는 수술을 했거든요. 코로 숨을 쉬기 위해서요. 화상을 입으면 피하 조직이 딱딱해지고 비대해져서 콧구멍이 좁아져요. 이젠 밤에 입을 다물고 양쪽 코로 숨 쉬며 잘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지 몰라요.”

 

없어졌을 때는 소중함을, 다시 찾았을 때는 기쁨을 느끼는군요.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다는 걸 배우죠. 이식한 피부를 뚫고 속눈썹이 자랐을 때, 짧은 손가락으로 펜을 잡고 다시 글씨를 쓰게 됐을 때, 수술 후 입이 커져서 다시 햄버거를 먹을 수 있게 됐을 때, 재활 훈련을 하면서 드디어 손이 귀에 닿았을 때, 그래서 오른손으로 전화를 받을 수 있게 됐을 때, 모두 모두 기쁨의 순간이었습니다.”

 

97학번 신입생이, 17학번 신입 교수로 강단에 섰습니다. 처음 스무 살과 두 번째 스무 살을 모두 학교에서 시작하네요.
“그렇군요. 제가 20년 걸려서 학교를 또 간 거네요. 사실 학위를 받은 걸 대단하다고 생각은 안 해요. 그동안 다른 분들도 열심히 살았을 거니까요. 아이를 키우기도 했고요. 다만 처음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저는 강연처럼 말할 기회도 많고, 인터뷰 기회도 있어서 질문을 받고 생각하는 자극이 많은 사람이었잖아요. ‘아휴 힘들어’ 하고 살다가도 다시금 처음 마음을 떠올리게 되죠.”

 

너무 유명해져서 불편한 점은 없나요.
“그 정도로 제가 유명하지는 않은데(웃음), 쉽게 포기를 못 하게 되죠. 예를 들면 미국에서 학교 다닐 때는 ‘(유학 간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지만 않았어도 그만둘 수 있었을 텐데’ 했거든요. 지금은 돌아보니 기분 좋은 부담이었던 것 같아요. 또 저라는 존재와 제 이야기를 적당히 잊어주신 분들도 있고요.”

 

겉으로 보기에는 커다란 시련을 이겨내고, 미국 명문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을뿐더러 마라톤까지 두 번이나 완주해 철인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 또 퍽 가깝게 느껴집니다.
“제가 책에 하나를 꾸준히 못 하고 이런저런 취미를 이것저것 바꾸어가며 한다고 썼잖아요. 엄마가 읽으시더니 이게 제일 너답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사실 저는 대단히 큰 사람이 아니라 작은 일을 하는 사람이에요. 다만 하나님께서 저를 메신저로 쓴다고 생각해서 세상과 접점을 많이 만들려고 해요.”

 

지칠 때는 없었나요.
“있는데 그걸 오래 묵상하지는 않으려 해요. 아 지쳤구나, 아 짜증이 나는구나, 하고 털어내려고 해요. 마음이 곤고할 때는 이 일이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를 계속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여기서부터 주시는 메시지를 발견할 일이 있는지, 아니면 툭툭 털어야 하는 일인지를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걸 반전시킬 또 다른 선물을 찾아내는 습관이 생긴 것 같고요. 그래야 더 잘 털어지니까요.”

 

‘꽤 괜찮은 해피엔딩’을 향해서요.
“내 인생을 인도하시는 이가 분명히 계시고, 내 인생에서 내가 뭔가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철저히 알았고, 그래서 전전긍긍하지 않으려고 해요. 물론 묻기는 하죠. 도대체 언제까지냐(웃음), 언제까지 이렇게 힘드냐. 하지만 내가 생각한 어떤 것과는 다르더라도, 꽤 괜찮은 해피엔딩으로 가고 있다고 믿고 안심해요. 내 생애 일어나는 것 중에 스스로 ‘합당하게’ 여기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성경에서도 사도들이 가르치다가 잡혀가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는데, 그들은 그 모든 걸 합당하게 여기거든요.”

 

마라톤 대회에서 뛰는 이지선을 생각해본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사람들은 모두 골인 지점을 통과했고 그만 남아 자기만의 레이스를 완주한다. 그런데 뜻밖에, 그를 위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한다. 25km 지점에서 그를 열심히 응원했는데 듣지 못하는 것 같아 35km 지점에 가 기다리던 사람이다. 그가 든 피켓에는 “이지선 파이팅! 푸르메재단 파이팅!”이라 적혀 있다. 그때까지 힘들어서 질질 끌고 오던 다리에 새로운 힘이 생겼다. 남은 7km를 가고도 남을 만한 새 힘이었다.

 

이지선의 존재는 마라톤 35km에서 만난 피켓 같다. 인생이 너무 고단하고 힘겨운데, 이 사점(死點)을 지나면 뜻밖의 기쁨이 기다리고 있다는 상징 같다. 그러니 세게 넘어져도 끝까지 한번 달려보자고. 정호승 시인의 ‘시각장애인 야구’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

 

"희망을 막을 수비는 없다."

 

유슬기 기자

 

출처: http://topclass.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30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