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빨간 옷도 없는 산타들

(임정진·동화작가)

 

성남 안나의 집엔 삼겹살이나 사과상자를 수시로 놓고 간다
유니폼도 없는 사철 산타들이다…
성탄절에만 찾아오는 산타는 하루살이 '짝퉁 산타'들이지만 좋은 일도 자꾸 하다 보면 세상을 밝게 하지 않겠는가

성탄절이 가까워지면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 대해 여러 가지 매서운 분석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성탄절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예수 탄생일로서의 정확성이 떨어지니 달력을 뒤져 다시 날짜를 계산해보자는 발언부터 성탄절과 찰떡궁합이라 믿었던 산타는 기독교 가문 출신이 아니라는 얘기도 나온다. 게다가 산타의 빨간 옷에 흰 수염, 넉넉한 뱃살도 근래 상업광고가 만든 초상화라니 영 체신이 안 선다.

그래도 성탄절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엄청난 양의 선물이 든 화수분 같은 보따리를 지고 비행 순록이 끄는 무공해 썰매를 타고 하늘을 누비며 3차원 입체 내비게이션도 없이 척척 우리 집을 찾아온다는 환상은 버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래도 난 성탄절에만 울지 않는 착한 아이를 찾아오는 산타가 분명히 짝퉁 산타, 모방 산타, 사이비 산타라고 믿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만났던 진짜 산타들은 일년 내내 근무를 하고 있다. 성남 안나의 집에서 노숙인을 늘 '우리 아저씨들'이라 부르며 밥을 차려내고 샤워실을 마련하고 인문학강좌에 수지침 치료시간까지 운영하는 이탈리아 출신 난독증 환자, 빈첸시오 김하종 신부님은 수많은 산타와 동맹을 맺고 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유니폼도 없는 그 산타들은 매달 삼겹살 두 근 값을 기부하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사과상자를 내려놓고 가거나 헌옷을 정리해 나눠주는 일을 수시로 말없이 해낸다. 신부님 고향 이탈리아 시골마을에서는 팔아 쓰라고 라벤더오일을 보내온다. 김하종 신부님은 무슨 날이 되면 오히려 힘들다고 한다. "명절 되면 갑자기 음식이 막 들어와요. 한꺼번에 다 먹을 수가 없어요. 우리 아저씨들은 매일 밥 먹어요. 그날만 밥 먹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나 같은 모방 산타는 꼭 무슨 날이 되어야만 안나의 집이 생각난다. 원고료로 받은 쌀이라도 한 부대 보내드려야 할 텐데.

또 한 분의 진짜 산타, 한의사 허영진 원장은 목발로 짚고서 간신히 걸을 수 있는 심한 장애가 있다. 허 원장은 푸르메재단
어린이한방재활센터에서 일주일에 나흘간 오전 시간을 어린 장애환자들을 위해 쓰고, 자기 한의원의 진료는 오후부터 본다. 일요일에는 지방 어린이 환자들을 치료하러 가는 날이 많다. 진짜 산타는 보통 이 정도 격무에 시달려야 '산타다워' 보인다.

침대에 누워만 있던 아이가 꾸준한 치료로 일어나 걷게 되고, 입의 근육이 약해 말을 못 하던 아이가 근육에 힘이 생겨 말을 하는 기적을 보고, 신앙도 없는 나는 예수의 기적을 믿게 되었다. 사람도 정성이 극진하면 이러할진대 사람을 몹시 사랑하셨던 예수도 분명 그런 멋진 일을 하시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허 원장 주위에도 연합 세력의 산타들이 많다. 약침을 기부하고, 침을 가득 맞아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붙잡아 주며 놀아주고, 동전 가득 찬 저금통을 보내오는 산타들 말이다.

그런가 하면 학교를 살려내는 산타도 보았다. 괘불재(부처 그림을 야외에 내걸고 베푸는 불교 의식) 구경하러 전남 해남까지 달려간 작년, 나는 금강 스님 산타를 만났다. 알고 보니 그 스님은 폐교 직전의 동네 초등학교를 살려낸 수퍼맨 산타였다. 괘불재에는 1000여 명의 많은 사람이 오니 많은 준비물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금강스님은 모금의 귀재였다. 필요한 물품의 종류와 가격이 미리 절 홈페이지에 좍 올라온다. 콩나물 20만원, 고사리 50만원, 절편 20만원, 고추장 20만원, 이런 식이다. 그러면 신자들이 그 밑에 댓글을 단다. 콩나물 10만원어치는 내가 맡습니다. 절편 5만원어치 내가 냅니다. 이름을 밝히기 싫으면 광주 사는 분이 꽃값 50만원 보시함. 이렇게 내용이 올라온다. 사정이 넉넉한 이는 무대장치 설치료 같은 큰돈 드는 항목을 맡는다. 적으면 적은 대로, 크면 큰 대로 꼭 필요한 항목에 쓰니 돈을 내는 이들이 참으로 흡족해한다. 내가 낸 돈이 어디 쓰이는지 알게 되니 속이 후련하다.

이런 진짜 산타들은 그야말로 불철주야 사시사철 산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성탄절 하루만 바쁜 산타들은 대개 하루살이 짝퉁 산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좋은 일도 자꾸 따라 하다 보면 더 잘할 수 있게 되고 좋은 기운은 자꾸 전염이 되어 세상을 밝게 할 터이니 짝퉁 산타 양산을 환영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