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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 그 여자의 여행일기

4월 11일, 재원이의 일기

여자친구는 지금 막 생일 선물을 체험하러 비행기를 탔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은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고 독일의 국경 한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네덜란드의 국경도시 마흐스트리흐트이다. 때문에 그녀는 독일과 벨기에, 네덜란드 여행은 비교적 자주 해온 반면, 아직 남유럽에는 가본 적이 없다. 이번 나의 생일 선물을 계기로 그녀가 처음 남유럽 여행을 하는 셈이다.

나는 며칠 전 생일 선물로 바르셀로나를 여행시켜준다고 약속했고, 그 자리에서 비행기 표와 숙박을 모두 예약해주었다.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사실은 유럽 국가 간의 항공편은 얼마 비싸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티켓을 발권할 당시에는 여행에 대한 걱정이 되지 않았으나, 막상 여자친구가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를 탄 지금, 당분간 서로 연락이 닿지 않을 생각을 하니 조금 겁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그녀가 지난 1월, 한국에서 출국하여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서 네덜란드 어느 전원도시인 마흐스트리흐트의 집까지, 네덜란드 도시 간의 이동을 할 때에도 혹시 누군가로 인한 소매치기 등 범죄의 표적이 될까 걱정되어 잠을 못 잤던 바 있다.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무사히 집에 도착했었다.

이번 생일선물인 스페인 여행의 경우는 사실 조금 더 걱정이 된다. 그럼에도 별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출발 며칠 전부터 바르셀로나에서 소매치기를 만나지 않도록 어떻게 후줄근하게 입을지, 귀중품은 어디에 보관할지, 어떠한 자세로 돌아다닐지에 대한 예행연습을 아주 꼼꼼히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의 플랫메이트인 베트남계 독일 친구 니나도 적극 도와 나섰다. 우리는 꽤 그럴싸하게 짐을 챙겼으나, 다만 그녀가 어깨에 맨 후지필름 X30 카메라가 눈에 띌까 조금 걱정이기는 하다. 이렇게 사소한 걱정을 나열하면 걱정이 끝도 없는 것을 알기에 이쯤 하도록 하겠다.

그녀는 언젠가 나에게 아주 화가 나서는 ‘난 너의 보부아르’가 될 수 없다고, 일종의 욕망을 고백했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내가 영화 ‘몽상가들’과 같이 프랑스식 치정극을 좋아하는 남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한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주된 가치관은 더욱 아니다. 그러다 다시 오해를 살 뻔했다. 바르셀로나 여행을 앞두고 나는 우디앨런의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라는 영화를 추천해주었다. 나는 그 영화를 보지 않은 채 다만 그녀가 좋아하는 우디앨런이 바르셀로나를 주제로 촬영한 영화라길래 권유한 것이 전부였다.

영화가 재밌어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또 혼날 뻔했다. 그 영화는 한국에서 <내 남자친구의 아내도 좋아>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영화로 개봉했었는데, 제목에서 표현하는 것과 같이 불륜과 같은 치정극을 그리고 있다. 비키라는 소녀와 그리고 스페인 남자친구, 그 남자친구의 아내 셋이 사랑을 나누는 내용이다. 다행히 영화의 내용은 눈살을 찌뿌릴 만큼 과하지 않고 소소하게 재밌는 코메디 영화였으나, 하마터면 나는 그녀에게 또 다시 나의 보부아르가 될 것을 강요하는 듯한 오해를 심어줄 뻔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걱정했던 것은 영화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의 내용이다. 영화를 보면 크리스티나라는 여자가 바르셀로나에 여행을 가서 만난 스페인 남자로 인해 미국에서 약혼한 전 남자친구와의 생활에 회의와 단조로움을 느낀다. 설마 내 여자친구가 내가 선물해준 비행기 표로 놀러간 바르셀로나에서 외국인과 눈이 맞는 것은 아닐까 상상도 해봤지만, 그녀를 믿기에 딱히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걱정하지 않았다.

이번 생일선물로 여행을 선물해준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가 조금 더 느긋한 분위기에서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내 여자친구인 가연이는 지금 네덜란드에서 유럽법을 공부하고 있는데 이번 학기 졸업을 앞두고, 무슨 진로를 이어나갈지 고민이 한창이다. 그녀가 전공하는 유럽법의 최대 단점은 아시아 사람들이 자리를 잡기에 다소 어렵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말 그대로 유럽법이기에 영어뿐만 아니라 다국적의 언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특히 불어는 거의 필수이다. 영어는 유창하지만, 불어를 전혀 못하는 관계로 앞으로 본인이 유럽법을 계속 소화할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유럽법을 전공하는 것은 그만큼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그녀에 비해 나는 사실 한국의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장래에 무얼 해나가야 할지 크게 뚜렷하지 않은 상태이다. 그나마 계획했었던 진로들도 수없이 변경되고 있다. 졸업 후 한동안 그녀와 함께 외국에서 살기로 결정하였고, 그녀가 앞으로 어느 나라에서 무슨 공부를 더 하든지 그 주변에서 어떻게든 비자를 받고 당분간 머무르며 생각을 정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몇 달간 장애인이 살기 좋은 국가인 네덜란드부터 시작해서 노르웨이, 벨기에, 독일, 캐나다까지 국경의 제한을 두지 않고 함께 같이 살 도시를 알아보았다. 대학원에 진학한다면, 어떤 전공을 공부할지 장애학, 사회학, 국제관계지역학, 국제법 등의 학문을 포괄적으로 다 알아보았다. 여자친구는 우리가 앞으로 어느 나라에 가던 우리가 사는 지역은 가급적이면 비가 오지 않고, 대중교통수단이 잘 되어있는 곳에 가기를 희망했다. 왜냐하면 나는 지체장애로 목발을 짚고 있어서 비가 오면 외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가 와도 좋으니, 자전거를 못 타도 좋으니, 유럽에 머물며 장애복지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의논 끝에 아마 당분간 네덜란드에 더 머물 것 같지만 아직 확언할 수는 없다. 그저 미확정된 계획일 뿐이다.

이번 바르셀로나 여행을 위해 인터넷 검색으로 정보를 수집하던 중 그녀는 내게 문득 “우리 나중에 바르셀로나 가서 살자. 스페인 찾아볼수록 너무 아름다운 것 같아. 장애인이 살기에도 좋지 않을까? 내가 알아볼게.”라고 말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응. 괜찮다면 그곳으로 가보자.”하고 긍정적으로 대답했다. 속으로 바르셀로나에는 소매치기가 많고, 전체적인 물가가 다른 스페인 도시보다 유난히 비싸다는 걸 우려하고 있었으나, 아름다운 양식의 가우디와 피카소 그리고 달리가 있으니 그곳에 있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지에 그녀는 바르셀로나 여행뿐만 아니라, 이곳이 장애인이 지낼만한지 함께 탐사를 가는 처지가 되었다.

만약 이번 여행선물이 무사히 잘 마무리된다면 앞으로 서로의 생일에는 여행을 선물해주자고 했다. 예기치 않은 선물로 그녀는 오늘 갑작스럽게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고, 이 여행이 오기까지 지난 일주일간 바르셀로나에 대해 샅샅이 조사하였다. 이전의 그 어떤 생일선물들보다도 능동적으로 참여하였고, 또 여행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매일 밤 설렜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막연히 걱정되거나 두려운 생각이 들 때면 ‘이럴 때 함께 있으며 의지했다면 좋을 걸’하고 그리워하기도 하였고,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는 그 여행지가 좋았던, 좋지 않았던 아마 서로의 기억에 평생 남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그녀가 여행을 끝마칠 때까지 3박 4일간 마음을 졸일 예정이다. 당장 비행기를 탔는데도 요새 유난히 많은 비행기 사고가 괜히 떠올라, 조금 진정하려고 집 앞에서 맥주 한 병과 프레첼을 사와서는 요기를 하고 있다. 노래는 유투브에서 한 가수의 앨범을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다. 이번 생일선물이 우리에게, 나에게, 그에게 모두 도움이 될 여행으로 장식될 것을 기대한다.

여자친구에게 항공기 티켓과 함께 보낸 생일 축하 편지 중 일부이다.

“매일 매일을 소유하지 않고 서로의 삶 위를 떠다니는 물개 같은 존재가 되자.
초조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판다가 되자.
오랜만에 만나면 기쁜 나머지 꼬리를 살랑대며 마구 핥는 강아지가 되자.
시간을 공유하자. 삶을 공유하자. 몸을 나누자.
칠월의 여름날에 다시 볼 때는 더욱 여유로워지자.
성숙해지자. 아파하지 말자. 삶을 온전히 유영할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믿자.
그간 나를 가꾸자. 조급해하지 않도록. 불안해지지 않도록.”

4월 20일, 가연이의 일기

지지난 주, 남자친구인 재원이가 다가올 생일선물로 3박 4일 일정의 바르셀로나 여행-비행기 티켓과 숙박-을 선물했었다. 재원이는 나에게 바르셀로나 여행을 선물하며, 주요 관광지에서 한국에서 구입한 티웨이 토끼인형과 함께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했었다. 재원이는 아직 바르셀로나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토끼인형은 일종의 재원이인 셈이다.

나는 처음에 무엇을 받을지 여러 가지 선물들 중 고민하다가, 대뜸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했고, 그 자리에서 합의한 끝에 바르셀로나 비행기 티켓를 무작정 예약했는데, 당장 여행기간 동안 바르셀로나 어느 곳에서 머물지 결정하는 숙소 문제가 너무도 신경 쓰였다. 대부분의 배낭여행객들은 보통 유스호스텔과 같은 도미토리에서 머무는데, 유럽의 도미토리는 웬만하면 남녀 혼숙의 체제였기 때문이다. 혼숙이 낯선 나에게는 이것이 내심 걱정되었으나, 결국 걱정을 뒤로 한 채 괜찮은 숙소를 함께 찾아 예약했다.

당시 나는 바르셀로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남자친구와 나는 함께 바르셀로나를 알아보았다. 우리가 함께 여행을 가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행을 함께 한다고 상상하며, 인터넷을 통해 여행지를 조사했다. 우리는 며칠간 바르셀로나에 대해 꽤 많이 찾아봤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바르셀로나에 대한 여행정보라기보다 바르셀로나 출신의 유명 작가인 살바도르 달리와 피카소에 대해서 더욱 관심있게 알아본 것 같다. 바르셀로나에는 달리와 피카소 미술관이 각각 있다. 이 미술관 외에도 알아본 바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극장, 가우디의 작품들 등 예술작품으로서의 건축물도 많았다.

숙소를 정한 다음날에는 대학교에서 같이 에스페란토를 배우는 마드리드 친구에게 맛있는 스페인 음식을 추천받았고, 꼭 타파스와 몇 가지의 것을 먹어보라는 조언을 메모해두었다. 그리고 나서는 바르셀로나의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배낭여행 카페 조언에 따라 소매치기에 대응하는 연습도 철저히 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인터넷을 찾아보는 것보다 내 주변에 있는 유럽여행의 경험이 있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훨씬 빠르고 더 도움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끝으로 바르셀로나에 대해 참고하기 위해 우디앨런의 영화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를 봤고,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더욱 더 바르셀로나에 가고 싶어졌다.

2일 뒤, 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출국하였고, 현지에 도착해서 지내는 3박 4일간은 남자친구와 연락이 도통 되질 않았다. 인터넷환경이 전체적으로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그간 남자친구는 불안해했다. 혹시 내가 소매치기를 만나 카메라나 아이폰이 도둑맞은 것은 아닌지, 누군가로부터 폭력을 당하거나 인종차별 등의 놀림을 받은 것은 아닌지 하는 그런 막연한 걱정들이었다. 다행히 이번 여행기간 중 사고는 없었으나, 들고 갔었던 카메라를 험하게 다루는 바람에 카메라 액정이 조금 더러워지기는 했다. 그래도 우리가 처음에 우려했던 극단적 상황에 비하면 아주 양호하다.

바르셀로나는 정말 열정적인 도시였다. 그 예로, 저녁이 되면 길거리 한복판에서 피아노를 설치하고 탱고를 추는 남녀를 종종 볼 수 있다. 시내 어느 곳에서나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에 혼자 온 관광객은 많지 않았고 내가 만난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커플, 친구 혹은 가족들이였다. 나는 매일 혼자 식당에서 삼시세끼를 챙기면서 쓸쓸한 식사를 했다. 심지어 어느 식당에서는, 종업원에게 푸대접을 받는 듯한 불쾌감도 느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푸대접이라기보다 평소 바르셀로나 사람들의 언행이 다른 유럽 사람들에 비해 세고 직접적인 것 같다. 특별한 차별 등의 다른 악의는 없어보였다.)

홀로 3박 4일간 여행을 하니, 괜히 매일 밤 서러워서, 남자친구가 보고 싶어 울었다. 짧지만 4일 동안 매일 밤마다 쓴 편지와 토끼사진들을 남자친구에게 정리해 이메일로 보내주곤 했는데, 이것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면 지금 함께 하지 못하는 슬픔에 몇 번씩 울컥했다. 내 편지에는 어느 여행지를 가던, 예컨대 구엘공원을 가던, 대성당을 가던, 현대미술관을 가던, 재원이가 이 건물들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아했을지 매순간 상상하며 다녔다고 적었다. 그리고는 다음에 꼭 함께 바르셀로나를 다시 오자고 했다. 4일간 나는 심심하면 해변을 걷고, 가우디 양식의 건물을 보다가 맥주를 잠깐 마시고 낮잠도 자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럼에도 또 다시 혼자 여행오기는 싫다. 또 나를 혼자 여행 보내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함께 꼭 같이 여행하자고 그랬다. 남자친구는 “응. 좋아” 하고 대답했다. 생일선물로 처음 받아본 여행인데 여행 기간뿐만 아니라, 준비기간을 포함하여 약 한 달간 하루하루 설렜고, 뜻 깊었고 때로는 더 초조하고 복잡했지만, 다시금 서로의 존재와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선물을 잘 주고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마지막으로 바르셀로나 히로나 공항 입구에서 본 한 공익광고이다. 어느 장애인이라도 접근성의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생각될 경우, 해당 공항에 민원을 제기할 수 있다고 영어로 적혀있다. 이에 따른 상담이 가능하도록 관련 부서인 유럽연합의 교통담당국 연락처도 광고에 함께 기록되어 있다. 현재 모든 유럽연합은 유럽연합법(EU법)에 의하여 반드시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임에도 멋진 소식이다. 한국에 있는 남자친구뿐만 아니라 모든 장애인들이 더 이상 장애물에 제약받지 않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여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글, 사진= 변재원 작가

변재원 작가는 1993년 10월 30일생으로 생후 10개월에 불의의 의료사고로 지체장애인이 되었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을 전공하고 있으며, 장애와 관련한 다양한 주제의 칼럼들을 기고하고 있다. 마주하기 힘든 현실을 그대로 바라보고, 사회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책임있는 삶을 사는 것이 그의 꿈.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존레논과 아웅산 수지 여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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