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없는 탐방] 천재작가 김유정 문학기행


 


천재작가 김유정 문학기행


 


청춘은 뜨겁다, 청춘은 흔들린다. 그래서 아프니까 청춘이다. 봄의 어느 날, 춘천으로 가는 열차는 들끓는 청춘의 열정으로 가득했다. 경춘 전철이 개통되면서 춘천을 오가는 시간은 빨라져 편리하지만, 덜컹거리는 완행열차의 낭만은 사라졌다. 춘천 가는 열차는 추억 속에서 희미하다. 속도에 지친 현대인들은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느린 열차여행을 그리워한다. 빡빡하게 들어찬 열차 안 승객들, 기타를 치며 낭만과 청춘을 노래하고 레일과 맞닿는 일정한 기차의 리듬은, 젊음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청춘들의 꿈을 실어 날랐다.


▲ 천재작가 김유정 문학작품들이 거대한 책꽂이처럼 펼쳐진 김유정 역 근처 휴게소
▲ 천재작가 김유정 문학작품들이 거대한 책꽂이처럼 펼쳐진 김유정 역 근처 휴게소

기차가 다닐 당시 춘천은 멀고 아득해 왠지 모를 서정과 낭만이 기차와 함께 굴러갔다. 춘천 가는 열차가 사라져 아쉽지만, 복선 철로를 달리는 경춘 전철에 몸을 실었다. 전철 안은 학생들로 가득했고 양손엔 짐꾸러미가 한가득 들려있다. 학생 대부분은 대성리와 청평에서 내린다. 청평과 대성리는 청춘들의 엠티 장소로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것 같다. 학생들이 썰물처럼 우르르 내리고 나니 열차 안이 텅 빈 공간 같다.


한 시간 남짓 걸려 김유정 역에 내렸다. 승강기 등 편의시설이 잘 마련된 김유정 역은 잘 생긴 기와집 형태를 띈 건축양식의 역사를 보여준다. 사람 이름을 딴 역은 전국에서 최초라고 한다. 역 안의 대합실은 김유정이 태어난 실레마을의 유례가 벽에 걸려 있고 철도 기념물인 판수동 저울(수화물용 저울)이 대합실 안을 지키고 있다.


역 밖으로 나와 김유정 문학촌으로 달려갔다. 문학촌은 천재작가 김유정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문학촌 내 전시관은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접근하기에 편리하고 1930년대 한국소설의 축복이라는 김유정 일대기를 볼 수 있어 관람객에게도 축복이다.


▲ 김유정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는 김유정 문학촌은 휠체어 접근이 편리하다.
▲ 김유정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는 김유정 문학촌은 휠체어 접근이 편리하다.

김유정은 춘천시 신동면 증리(실레마을)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서울 종로로 이사 한 뒤 일곱 살에 어머니를,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읜 뒤 모성결핍으로 휘문고 시절까지 말을 더듬기도 했다. 말을 더듬다 보니 놀림 대상이어서 대중 앞에서 말하기를 극도로 꺼려했다. 당시엔 말더듬이가 지금의 언어장애가 있는 사람이다. 언어장애가 있다 보니 타인과 소통하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김유정에겐 훨씬 편했을 것이다.


언어장애로 대인기피증까지 있어 그의 삶은 질병과 장애로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휘문고 시절 병약한 김유정은 결석이 잦아 재적까지 당했고 병세가 조금 호전되면서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대학시절 김유정은 첫눈에 반한 당대 명창 박녹주를 사랑하게 돼 끝없이 구애했다. 당시 박녹주는 김유정 보다 연상이었고 지금의 소녀시대만큼 대중에 관심을 받는 인기 있는 명창이었다. 어린 김유정의 당돌한 구애를 받아줄리 없는 박녹주는 그의 구애를 거절한다. 실연의 아픔과 병세가 짙어지면서 김유정은 고향인 실레마을로 내려와 작품 활동에 몰두한다. 작품 활동 당시 김유정은 해골처럼 말라있고 작은 골방에 빛도 들어오지 못하게 커튼을 쳐놓고 글쓰기에 전념한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고향인 실레마을을 배경으로 탄생한다.


▲ 언어장애와 질병으로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글쓰기에 열정적이었던 소설가 김유정
▲ 언어장애와 질병으로 힘든 유년시절을 보냈으나 글쓰기에 열정적이었던 소설가 김유정

금병산에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옴폭한 떡 시루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실레(증리)는 작가 김유정이의 고향이다. 마을 전체가 작품의 무대로 <점순이> 등 소설 열두 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실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금병산 자락의 ‘실레이야기 길’은 문학기행을 떠나온 여행객에게 인기 만점이다. 이야기 길 여섯 마당 중 재미있는 이름이 붙은 길도 많다. ‘들병이들이 넘어오던 눈 웃음길’은 병에다 술을 가지고 다니면서 파는 사람들이다. 소설에는 들병이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인제나 홍천에서 이 산길을 통해서 마을에 들어와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야기가 많이 그려졌다.


소설 <가을>에서는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도 있다. 작품 속 복만이는 소장수 호하거풍에게 매매 계약서를 쓰고 아내를 팔아먹은 뒤 덕냉이로 도망치던 고갯길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소장수에게 팔려간 복만 아내의 삶은 얼마나 기막힌 삶인가. 이처럼 금병산은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한다.


▲ 김유정의 고향 실레마을에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길들과 만날 수 있다. 문학기행을 온 여행객에게 인기만점.
▲ 김유정의 고향 실레마을에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길들과 만날 수 있다. 문학기행을 온 여행객에게 인기만점.

금병산 정상까지는 산책할 수 없지만 산 중턱까지는 휠체어로 걸어 갈 수 있다. 가는 길 중간에 ‘봄봄’ 길 다방을 만났다. <봄봄>도 김유정 작품의 하나다. 평일이라 봄봄 길 다방은 열지 않았지만 허름한 길 다방은 잠자고 있던 여행객의 서정을 불러낸다. 오붓한 산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니 재잘거리는 산새소리가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 같다. 언제쯤이면 세상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욕심을 내려놓는 그 때쯤이면 고요한 산사에서 자연과 하나되어 물처럼, 산처럼 자연이 내어주는 만큼만 가지고 살아가고 싶다.


발길을 돌려 마을로 다시 내려왔다. 마을 곳곳엔 김유정이 살아서 작품 속을 걸어다는 것 같았다. 실연과 학교 제적이라는 상처를 안고 귀향해 학교가 없는 실레마을에 ‘금병의숙’ 야학을 만들어 농촌계몽활동을 벌인다. 일제강점기인 30년대에 궁핍한 농촌 현실을 회화적으로 체험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간 김유정은 농촌과 도시의 밑바닥 인생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신명에 빠진다.


▲ 김유정 역 앞 레일바이크 체험장 옆에 있는 넓은 규모의 장애인 화장실
▲ 김유정 역 앞 레일바이크 체험장 옆에 있는 넓은 규모의 장애인 화장실

▲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이 레이바이크 체험장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설치된 리프트
▲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이 레이바이크 체험장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설치된 리프트

<산골나그네>와 <총각과 맹꽁이>를 발표한 뒤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 공모에도 당선되고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가작으로 입선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벌인다. 한편 ‘구인회’ 후기 동인으로 가입한다. 김유정은 등단 이후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되는 등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글쓰기의 열정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김유정은 31세라는 짧은 나이를 끝으로 요절을 한다. 그는 떠나는 마지막 밤에 새벽 달빛 속에 하얗게 핀 배꽃을 보며 삶을 마감한다. 30편의 단편소설을 탁월한 언어감각에 의한 독특한 체취로 오늘까지도 재미와 감동을 잃지 않고 있다.


‘여섯 마당 이야기 길’을 산책하다가 예술인촌에서 한지화가 함섭 선생님과 우연히 만났다. 함섭 선생님은 실레마을 예술인촌 곳곳을 친절한 철명과 안내로 그의 넉넉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술인촌 안내가 끝나고 나서 그의 작업실로 초대했다. 작업실은 그의 작품들로 가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지로 만든 미술 작품은 내겐 너무 생소했다. 함섭 선생님은 자신의 작품을 하나하나 진지하게 설명해 준다. 작품을 설명하는 그의 눈빛에서 그림에 대한 강렬한 열정과 애정이 묻어난다. 작품도 놀라웠지만 화가의 이력이 더욱 놀라웠다. 함섭 화가는 근현대 화가 20인 중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명작가인 것이다.


▲ 함섭 선생님은 한지에 물감을 칠하는 대신 한지 색 그대로 작품을 만든다.
▲ 함섭 선생님은 한지에 물감을 칠하는 대신 한지 색 그대로 작품을 만든다.

한지는 천년동안 변화지 않는다고 했던가. 천년의 세월을 견딘다고 하니 그의 작품은 천년 후에 후손들도 볼수 있다는 것이다. 한지에 물감을 칠하는 것도 아닌 한지 본연의 색 그대로 작품을 만드는 선생님은 한지를 내보이면서 작업을 잠시 보여주신다. 한지의 종류는 다양하고 색도 곱다. 광목 같은 느낌의 한지는 탱크나 비행기 외부에 바르면 최첨단 레이더에도 잡히지 않는다고 한다. 우연히 찾아온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함섭 화가의 정성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작업장을 나와 레일바이크 체험장으로 발길을 이어갔다.


▲ 레일바이크가 늘어선 체험장
▲ 레일바이크가 늘어선 체험장

▲ 손님이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추억의 달고나
▲ 손님이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는 추억의 달고나

레일바이크 체험장엔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도 접근이 용이하다. 체험장까지 승강기가 설치돼 있어 편리하게 레일바이크 체험이 가능하고 역 주변 볼거리 중 휴게소가 압권이다. 휴게소 외관은 거대한 책꽂이 같다. 유명작품을 다 볼 수 있는 휴게소는 김유정 문학기행의 빠질 수 없는 명소다. 휴게소 앞엔 추억의 달고나도 이천 원에 팔고 있다. 달고나는 여느 곳과 달리 손님이 직접 만들 수 있다. 게다가 모양대로 뽑으면 공짜 기회가 더 주어진다.


추억이 있고 젊음이 있고 열정이 있는 김유정 문학기행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낭만을 실어 나르고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작가 김유정의 작품과 청춘을 만날 수 있다. 청춘의 열정과 아픔이 녹아있는 춘천 실레마을. 추억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떠나보자.



• 가는 길

상봉역에서 경춘 전철 승차, 김유정 역 하차


• 먹거리

유정마을 닭갈비, 김유정 문학촌 바로 옆


• 장애인화장실

김유정 역, 레일바이크 체험장 휴게소


• 문의

휠체어 배낭여행, http://cafe.daum.net/travelwheelch



*글, 사진= 전윤선 여행작가


 




 


전윤선 작가는 지체장애 1급으로 휠체어를 타고 전국을 여행합니다. 한국장애인문화관광센터(휠체어배낭여행) 대표로서 인권•문화 활동가이자 에이블뉴스 '휠체어 배낭여행'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KBS 3라디오 '함께하는 세상만들기, 휠체어로 지구한바퀴' 코너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장애인들에게 자유롭고 즐거운 여행길을 안내하기 위해 오늘도 전국을 누빕니다.


 


“신체적 손상이 있든 없던, 사람은 자유롭게 이동하고 접근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소통하길 원한다. 손상을 가진 사람이 이동하고 접근하는데 방해물이 가로막지 않는 그런 세상을 꿈꾸며 나의 동그란 발은 오늘도 세상을 향해 자유로운 여행을 떠난다. 자유가 거기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