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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씨이야기] 골목 끝에 선 여자

골목 끝에 선 여자

그 여자가 낫을 들고 골목 끝에 서있다. 어스름 해가 넘어가고 집집마다 생솔 타는 내음이 굴뚝에 피어오를 때. 그 여자의 그림자도 길어졌다. 그 여자의 추레한 차림새를 새삼스레 살핀다. 한 손에 낫을 들고 다른 한 손에 꽃을 들었다. 바람이 그 여자를 어떻게 스쳐서 어떻게 불어가는지 보이는 것만 같다. 온 몸에 털이 온통 쭈뼛해진다.

파란지붕집 아줌마

 

그 여자 반절도 안되는 꼬마였던 우리들은 슬슬 피하기 바빴다. 낫으로 꼴을 베듯이 어린아이 손목을 베어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미친 여자의 상징, 꽃을 든 모양새도 심히 위협적이었다. 그 여자가 나타나면 “엄마아아아아아”하는 꼬마들 비명이 온 동네를 뒤흔들었다.

우리가 호들갑을 떨고 그 여자에게 돌이라도 던질라 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동네 어른들은 큰일이라도 날듯이 심각하게 우릴 혼냈다. 그러면 못쓴다고. 그리고 가끔 우릴 데리고 그 집에 갔다. 어딘지 스산한 느낌이 드는 파란지붕집. 검은 비닐봉지에 싼 김치나 반찬을 건네고 안부를 묻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아 우리 애만은 해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구나 싶었다.

 

 

이웃이 되는 방법

 

어느 가을, 노을이 눈물 나게 아름답던 날. 그 골목 끝에 선 그 여자가 왠지 무슨 말을 건네려는 것 같았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까.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가니 한 손에 든 꽃을 내민다. 손을 내밀어 받아들고 보니 예쁜 들풀과 꽃만 골라 한 아름. 품에 가득 안고 집에 가니 엄마가 햇살처럼 웃었다. 마음이 한 뼘 자란 아이에 대한 뿌듯함이었을까. 집안 가득 꽃향기가 퍼지고 세상 누구보다 충족되어 있다고 느꼈다.

물론 그 여자가 살인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마 몇 해가 지나 제법 사람구실 하는 국민학생이 됐을 때쯤인 것 같다. 좀 모자라고 말도 못하는 여자의 가족들이 그 여자를 파란지붕집에 남겨두고 동네를 떠나버린 것도 알게 됐다. 숨기고 싶은 비밀이자 버리고 싶은 짐이었던 그녀를 두고 돌아선 가족들의 마음도 조금씩 이해가 됐다. 그러고 나니 해질녘 그 골목이 무섭지 않았다.

골목 끝에 선 여자에게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이 여자가 떠오른 건 얼마 전 일이다. 요즘 견디기 힘든 일들이 한꺼번에 닥쳐와서 그랬던 걸까. 꿈속에서, 나는 해질녘 그 골목 끝에 서있었다. 도와달라고 아무리 외쳐도 누구에게도 그 소리가 닿지 않았다. 눈물 범벅이 되어 깨고 나서야 골목 끝에 선 그 여자에게서 도망치던 어린 나를 기억해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그 골목 끝에 설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 꿈을 꾼 이후 가끔 나에게서 그녀를 본다. 나또한 가끔은 주저앉고 싶은 일들이 생기니까. 골목 끝에 서서 손을 내민다. 내 손을 잡아달라고. 가끔은 성공한다. 때때로 실패한다. 그들은 골목 끝에 선 나를 낫을 듯 미친 여자 취급한다.

손을 내미는 사람들

 

 

하지만 기억한다. 내민 꽃을 받아들 듯 마음을 열고 그녀를 받아들인 그 날을. 집으로 향하던 두근거리던 발걸음을. 그녀를 감싸 안고 함께 살아가던 동네 이웃들의 선한 얼굴도 기억 한다. 그녀에게 논둑의 잡풀을 베는 일을 맡기고, 그 댓가로 음식을 나누던 사람들.

살면서 가끔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 도와달라는 말조차 못하고 골목 끝에 선 사람을 보듬어 안는 손길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언젠가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면 이번에는 내가 꽃을 건네고 싶다. 내민 손을 잡지 못했던 나를 용서해달라고.

*글= 이예경 간사 (홍보사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