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메와의 인연

[홍경완/ 신부, 부산 가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



 독일 문학계의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책 중에 『인류 역사의 운명의 순간들』이란 책이 있습니다. 1927년에 쓰인 책이니 벌써 고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98년 이 책이 우리 말로 번역되면서『광기와 우연의 역사』란 제목을 달고 출판됐습니다. 원제와 느낌은 다르지만 저자의 의도를 꿰뚫고 있는 꽤 괜찮은 제목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열 두 가지 사건들을 소개하며, 인류의 역사란 것이 실상 계획하고 추진하면서 의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기 보다, 차라리 우연에 의해 만들어진 경우가 더 많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단 한번의 긍정이나 부정,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늦거나 하는 일이 순간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개인뿐 아니라 민족이나 심지어 인류 전체의 운명의 흐름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계획이나 의도란 것이 그 결과까지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얼마나 자주 겪어 왔던가요? 그래서 모든 것이 ‘신의 섭리(攝理)’ 아래 있다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리는가 봅니다.



푸르메와의 인연도 그렇게 ‘우연’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연’히 독일 남부에서 여행이라면 너무 길고, 삶이라면 너무 짧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뮌헨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지요. 그 시간 한 가운데 ‘우연’히 맥주를 앞에 놓고 기자 한 분(푸르메재단 백경학 이사)을 만나게 되었고, 또 ‘우연’히 그 만남을 지속시키게 만드는 사건들이 연이어 생겨났고, 백 기자의 ‘우연’한 가족여행에서 부닥친 불의의 사고로 삶을 바꾸게 되는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이제까지 관심의 영역에서 물러나 있던 ‘재활’과 ‘장애인’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푸르메재단을 후원하게 된 것이지요.

재활병원은 우리에게 아직은 황무지입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새롭게 해야 하는 일입니다. 땅을 일구는 일에서 거름을 주고 물을 주는 일까지 모두 벅찬 일이기도 합니다. 거대한 벽도 만나겠고, 넘어지는 일도 숱하게 만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관심이 가고 귀가 기울여집니다. 그건 무엇보다 ‘처음’이 가지는 어려움일 것입니다. 그 어려움만큼 아름다운 것이 처음이 아닐까요? 모두는 아니지만 대개 처음은 늘 싱그럽고 새롭습니다. ‘첫만남’이 그렇고, ‘첫사랑’이 그렇고, ‘첫출근’ 또한 그렇습니다. 그 안에는 모두 싱그러움을 잔뜩 담고 있습니다. ‘첫 재활병원’도 그 범주에 넣어도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 아름다운 처음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이쯤되면 우연은 우연의 영역을 넘어 심상치 않은 ‘인연’이 되고, 신의 섭리가 우연을 가장하여 그렇게 묶어놓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늘 그렇듯 그 섭리란 것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곳을 보게 해 주고,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해 주는  강력한 도구로 작용하게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내겐 그 섭리가 장애인의 재활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눈을 뜨게 만들어 주는 듯 합니다. 실상 우리 사회는 이제껏 앞만 보고 질주해 오면서 보지 못했던 것이 많습니다. 나아가야 할 목표에만 관심을 가지고 앞으로만 달리다보면 주변은 쉬 눈에 들어오지 않기 마련입니다. 섭리는 이런 주변을 다시 보게 만들어 줍니다. 그 주변에서 관심 한번 제대로 못받고 그늘에 가려져 있는 장애와 재활이라는 후미진 구석을 어떻게든 밝게 비추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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