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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후 준비

[박봉희/ 한국의료생협연대 사무총장]

 하나

대학로에 위치한 서울대 병원 오르막길에서 자신에게 문득 묻는다. ‘내가 이렇게 병 수발을 하려고 직장을 그만 둔 것인가?’ 서울 YMCA 청년회 활동을 함께 하던 선배가 어머님이 뇌경색으로 의식불명이라며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가끔 병원에 들러 달라고 부탁해 왔다. 마침 5년간 다니던 직장을 쉬고 있던 터라 별 뜻 없이 그러마하고 선배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당시 선배 아버님이 병간호를 하고 있었는데, 가끔 병원에 들러 아버님을 도와드리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오곤 했다.

그게 인연이 되었을까 선배어머니는 시어머니가 되었다. 어머님은 어혈을 쏟아낸 이후로 의식이 명료하게 돌아왔다. 2개월 전 장례 절차를 준비하라는 선언을 받았던 분이 말이다.

결혼 당시 뇌경색 후유증으로 언어장애와 거동이 불편한 시어머니는 10여년의 세월을 보내고 돌아가셨다. 천식을 평소 앓고 계시던 시아버님은 천식이 아닌 갑작스럽게 나타난 위암으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5개월 정도의 투병생활이 이어졌다. 퇴원 후 누군가 돕는 손길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지역의 자원 연결이 쉽지 않았다. 온전히 가족이 책임져야 하고, 그것도 여성이 온 몸으로 감내해야했다.

그 긴 터널을 지나왔다.

동성동본이기도 했지만, 병든 시어머니 때문에 부모님의 반대는 완강했다. 그렇게 주위에서 반대하는 결혼을 결심할 때만해도 어려운 결혼을 통한 ‘신앙적인 성숙’을 원할 정도로 신앙은 나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세 자녀 양육과 어르신들 병 수발을 하기란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녹녹치 않았다. 당시에 ‘왜 유독 노인 문제, 병과의 싸움이 가족 내에서 숨 쉴 틈도 없이 전개되는 걸까?’하고 하느님께 묻고 또 물었다.

 

87년 6월 민주화항쟁이후 진보적 보건의료인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기독청년의료인회(이하 기청의) 회원 40여명이 공동으로 출자한 민중의원 “인천평화의원”이 89년에 문을 열었다. 인천지역에서 노동자의 건강과 산업재해(직업병, 과로사) 예방 그리고 대책활동을 위해 상담실을 운영하던 유일한 의원이었다. 이는 직종별 보건의료단체와 다르게 신앙을 가진 다양한 직종의 의료인들로 구성된 기독청년의료인회의 초기 활동으로 만들어진 의원이었다. 노동자 병원이던 인천평화의원은 의료생활협동조합(이하 의료생협)으로 1996년에 재창립되었다. 한국에서 의료생협 2호가 탄생한 셈이다. 당시는 안성의료생활협동조합(1994)이 막 태동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농촌 공동체가 살아있는 안성과 달리 도시에서 생활협동조합이 가능할 것인가를 두고 열띤 토론이 밤새워 이뤄졌다. 반대도 있었지만 결국엔 인천평화의원을 처음 만들었던 회원들이 소유권을 지역사회에 이양하는 것에 동의하면서 가능해졌다. 기독청년의료인회 회원이면서 간사 역할을 결혼과 동시에 해오던 나는 연년생의 아이들을 키우느라 사표를 내고 잠시 쉬고 있었다. 채 한 달을 못 쉬고 시간제 방사선사 제안을 받고 전환기였던 인천평화의료생협에 직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아이들이 성장하고, 나이 40 이후에 열심을 가지고 일 할 수 있는 소명은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을 무렵인 1998년에 일본의료생협을 방문할 기회가 왔다. 일본 방문은 소명을 찾아나서는 내 삶의 새로운 기획이었고 일종의 암중모색이었다. 그렇게 방문하게 된 일본 한신의료생활협동조합.

 1층은 재활센터, 2층은 재택간호, 3층은 데이케어 룸으로 순환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가능하면 아픈 노인이 누워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한 내부 시설, 집에서 사용하던 물건들로 각자 개성 있게 배치한 시설의 방들, 획일화 되어 있지 않고 개인이 존중되는 재활중심의 노력들이 곳곳에 베여있었다. 일요일이면 지역 청소년들의 발표회도 가능하고 조합원들의 자원 활동으로 운영되어지는 데이케어센터, 30년 동안 자신의 혈당과 혈압을 체크한 수첩을 자랑하는 당뇨와 고협압 환자의 자조모임인 반별 모임, 치매노인과 놀이치료를 재미나게 하고 있는 다운증후군 직원……, 그 해맑은 직원의 웃음은 두고두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의사인 한신의료생협 부이사장은 “의료생협은 인생의 마지막까지 집에서 보낼 수 있도록 그리고 안심하고 지역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하는 것이다”라며 의료생협의 목적을 소신을 다해 설명해 주었다.

우리 가족이 온전히 감내하던 노인 문제를 의료생협이란 공간에서 그것도 지역사회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이미 고령사회로 진입한 한국사회에서 의료생협을 제대로 해보자 하는 열정이 솟구쳤다.

2003년에 사회복지대학원을 마쳤다. 당시 대학원 3학기 과정 중에 시아버지 투병간호까지 겹쳐 계속 공부를 진행한다는 것이 혹시 사치가 아닐까? 나의 욕심은 아닌가? 라는 갈등을 하며 마친 과정이었다. 시집에서 그 지난한 병과의 싸움 그리고 뇌출혈로 쓰러진 친정아버지의 경험은 결코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노인문제가 발생하면 가족이 책임질 수밖에 없는 현 사회제도와 시스템을 바꿔내는 역할이 필요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것을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풀어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공공의료가 취약한 한국사회에서 주민 참여형 의료생협의 양적 확대가 이뤄져야 한다고 믿었다. 현장 실천을 기반으로 보건 의료 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나의 사명이 되었다. 한국의료생협연대의 출발도 그 연장선이었다.

▲ 한국의료생협연대 활동

치매에 걸린 노모의 문제로 한 가족이 바닷가로 자동차를 타고 질주한 사건과 같이, 우리 가족이 경험한 노인문제와 주변에서 겪는 어려움들은 지역사회 곳곳에서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다. 결혼과 자녀양육, 장애, 노인문제, 여성의 자아실현 등 이 모든 문제가 가족중심의 접근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이제 한국사회도 노인인구가 10%이상인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노인문제가 어느 특정 가정의 문제가 아닌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볼 때 이를 더 이상 가족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 지역사회 내에서 공동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2008년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여전히 제도 시행 초기의 혼란이 존재하고 있다. 시설, 인력, 관리운영 체계 등 공급자의 편에서 이런 저런 문제들을 드러내고 있지만, 장기요양서비스를 이용하는 노인환자, 가족들의 고충은 어느 편에서도 들을 수 없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제도일까?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보완하고, 제도가 올바로 정착할 수 있도록 견인하는 것이 주민참여형 의료생협의 몫이기도 하다. 조합원이 주인이 되고, 운영과 이용에 참가하는 의료생협의 확대는 어쩌면 나의 노후 준비이기도 하다.
의료생활협동조합은?

의료생활협동조합은 언뜻 들으면 생소하고 낯선 단어 같지만, ‘의료+생활+협동조합’이라고 풀이해 놓으면 한결 이해가 쉽다. 의료라는 이름으로 묶인 건강생활공동체. 아픈 사람만이 이용하는 곳이 아닌 건강한 사람들 다수가 모여 있는 협동조합. 내 형제와 같은 주치의가 있는 병원. 환자가 주인인 병원.

지역주민과 의료인이 협동하여 우리 가족과 이웃의 의료와 건강, 생활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1998년 12월 제정)에 근거한 협동조합이다.
의료생협은 조합원이 주인으로 출자·이용·운영에 참여하는 조직으로 이윤추구보다는 공공의 이익(주민의 건강)을 위한 사업을 전개함으로 의료의 상품화를 극복하는 제3의 부분으로서의 위상을 가진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다양한 보건예방활동과 생활습관의 변화를 꾀하며, 의료 전문가와 의료 소비자가 협동적으로 만드는 조직으로 지역사회 통합을 지향한다.

이러한 의료생협은 한국에서는 1994년 안성을 시작으로 인천평화(1996년), 안산(2000년) 초기 활동에 이어 2002년에 원주, 서울, 대전, 전주, 함께걸음(서울 노원구), 청주, 용인 등 (한국의료생협연대 소속)으로 이어져 16년의 의료생협 활동이 본격화되고 있다. 일본은 80여년의 역사에 117개 조합, 220만 조합원의 활동으로 활성화되어 있기도 하다.

저출산, 고령화가 가속화되어 가고 있는 시점에서 의료생협은 지역사회 중심의 21세기 의료- 재택의료, 투명한 운영, 소통의 공간으로 더 많은 역할이 요구되어 지고 있다.
의료생활협동조합 [ http://medcoop.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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