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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와 봄비

며칠 전 봄비가 내렸다. “콩, 콩, 콩” 천창(天窓)을 때리는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 없어 마당에 나가 한동안 비를 맞았다. 언제부턴지 비만 내리면 노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어릴 적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박인수의 ‘봄비’이다.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 혼자 쓸쓸히 길을 걸으며….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봄비 내리는 날이면 박인수의 ‘봄비’를 부르고, ‘봄비’를 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김추자가 부른  ‘봄비’도 있었지만 비 내리는 오후가 되면 레코드 가게에선 어김없이 박인수의 노래를 틀고 또 틀었다. 길거리에 온통 ‘봄비’가 넘쳐났다. 비닐 우산을 쓰고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도 ‘봄비’ 노랫소리가 들리면 하늘 한번 올려다보고 상념에 젖은 채 발걸음을 총총히 옮겼다.

어린 나이에도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듯 끊어지는 박인수의 목소리는 애간장을 녹였다. 한(憪)이 많은 시절 때문이었을까. 70년대 사람들은 그의 노랫소리에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주목을 받았던 그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고 들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아주 우연히 기회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일산 외곽에 있는 병들고 의탁할 곳 없는 노인들을 모신 요양원에서였다. 집근처에 중풍과 치매 노인들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마을사람들과 점심 한끼 대접해 드리자고 찾아간 곳이었다.

2002년 봄. 꼭 이맘때였던 것 같다. 요양원은 콘테이너 박스를 연결한 가건물이었다. 큰 나무십자가가 걸려있는 어두운 거실을 지나자 두 세 명의 할머니들이 기거하는 작은 방들이 나타났다. 방안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반쯤 열려 있는 문틈으로 할머니들이 누워계신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마지막 방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점심봉사가 끝나고 요양원을 떠나려는 순간 원장님이 우리를 잡았다. 노래 한곡만 듣고 가라는 것이다. 원장님은 굳게 닫힌 방으로 다가가 무언가 간절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초로의 남자가 기타를 메고 나왔다. 반백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 찼다. 허리마저 꾸부정했다. 몇 번 목청을 다듬으며 기타 음감을 잡더니 이윽고 노래를 시작했다.

참 오랜만에 듣는 ‘봄비’였다. 스러질듯 스러지지 않고 끊어질듯 끊어지지 않는 봄비가 갑자기 어두운 거실에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난 놀라움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음색은 더 많이 탁해지고 음폭이 약해지긴 했지만 내가 어린 시절 듣었던 바로 그 노래였다.
그가 내 놀란 표정을 보았을까. 아니 ‘봄비’에 몸을 맡기고 온몸으로 노래를 불렀으니 관객의 표정이 뭐 중요하랴. 노래를 마친 그는 기타를 들고 다시 어두운 복도를 지나 방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원장님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저런 이유로 그가 이곳을 찾아들었을 때 위암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고 했다. 젊음도, 돈도, 명예도 모든 것을 잃고 그는 이곳에 왔다. 의탁할 데 없는 노인이 된 그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조용히 암투병을 하고 있었다. 요양원을 나서며 그가 이 모진 세월 속에서 제발 살아남기를 나는 간절히 바랬다.

그리고 7년만에 다시 요양원에 전화를 걸었다. 천창을 때리는 봄비 소리를 들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젊은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내 목소리가 유난히 떨렸다. “봄비 노래를 불렀던 박인수씨가 아직 그곳에 계신가요?”

“네, 그럼요. 이제 몸이 많이 좋아지셨어요.”

‘아! 그가 아직 살아 있구나!’ 나는 하느님께 감사했다.

시간이 지난 뒤 그가 그 애절한 목소리로 부르는 봄비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이 떨어져 한 없이 적시는 내 눈물과 합쳐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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