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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선 교수 ‘사는 게 맛있다’

푸르메재단 후원자 이야기_이지선 한동대 교수

 

“사고 후 일주일 동안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이 몸속 깊숙이 박힌 것 같았던 산소호흡기를 빼고, 물을 주었습니다. 오랜 시간 말라 있던 제 목을 축여주는 그 물은 너무도 시원하고 맛있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물이었습니다. 아직도 그 시원한 맛을 잊지 못합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병상에 누워 아주 사소하지만 감사한 것들을 새로 발견할 수 있었다. “창밖에 비친 구름을 볼 수 있어 감사하고, 짧은 손가락으로 환자복의 단추를 채울 수 있어 감사하고, 엄지손가락이 남아있어 글을 쓸 수 있어 감사하다”는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내일이면 또 다른 감사할 거리가 생기겠구나’하는 희망을 갖게 됐다.

2000년 여름, 학교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빠를 만나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그녀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음주 운전자가 낸 사고였다. 전신 55퍼센트 3도 화상을 입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때, 지선씨의 나이는 겨우 23살이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끔찍한 고통과 후유증, 끝없는 수술을 견뎌야 했다. 그런데 그녀는 단순히 견디기만 한 게 아니었다. 2003년 출간한 <지선아 사랑해>에서 지선 씨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고통이 아니라 감사를 노래했다. 내가 지선 씨를 처음 알게 된 것도 그 책을 통해서였다.

2005년 3월 푸르메재단 설립허가를 받자마자 나는 지선 씨의 홈페이지를 찾아 ‘꼭 한번 만나고 싶다’는 글을 남겼다. 금방 연락이 왔다. 여의도의 작은 카페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죽음을 떨치고 일어선 만큼 강하고 독할 줄 알았는데 여리고 가냘픈 사람이었다. 나는 지선 씨에게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푸르메재단의 홍보대사가 되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처음에 주저했던 그녀는 “저에게 기적이 일어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며 “치료가 필요한 장애어린이와 재활병원 건립의 필요성을 알리는데 적극 나서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지선 씨는 푸르메재단의 홍보대사가 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선 씨는 석 달 뒤 미국 보스턴대로 유학을 떠났다. 자신과 같이 사고와 질병으로 후천적인 장애를 갖게 된 사람을 돕기 위해 재활상담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하루빨리 대학을 졸업해 유치원 선생님이 되길 원했던 그녀가 유학을 결심한 것은 남들의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화상을 입어 외모가 크게 변한 그녀를 두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굳이 가까이 다가와 얼굴을 뜯어보며 불쌍하다고 혀를 끌끌 차는 노인들도 있었고, 밥 먹으러 음식점에 들어갈 때조차 눈치를 봐야 했다. 모진 사람들에게 치이던 그녀는 자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대해줄 수 있는 곳으로 유학을 결심했다.

(왼쪽) 2005년 6월 1일 이지선 홍보대사 위촉식과 (오른쪽) 2014년 션과 이지선 홍보대사가 함께한 토크콘서트
2005년 6월 1일 이지선 홍보대사 위촉식(왼쪽)과 2014년 12월 션과 이지선 홍보대사가 함께한 토크콘서트

이듬해 지선 씨는 수술을 받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 화상은 피부와 신체조직을 파괴하는 것이기에 다른 부상보다 통증이 더 심하다고 한다. 게다가 이식받은 피부는 시간이 지나면 수축으로 변형되고 결국에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주 수술을 받아야 한다. 지선씨는 입 주위의 피부가 오그라들면서 입이 벌어져 침을 흘리게 됐고 턱 아래 피부가 줄어들면서 고개가 자꾸 앞으로 숙여지는 고통을 당했다. 그녀는 이미 40여 차례의 수술을 받았고 지금도 매년 두세 차례 수술을 받아야 한다. 얼마나 힘든 일일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화상의 통증과 수술대에 올라야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원동력이 무엇일까. 좌절을 통해 스스로 단련하고 고통을 승화시킨 그녀에게서 나는 경외심을 느낀다.

수술을 위해 잠시 귀국한 그녀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유학 생활의 어려움을 털어놓았지만 이야기가 미국 장애인지원제도의 장점과 자신의 전공을 어떻게 우리 사회에 적용할 것인가에 이르자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제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바닥까지 낮아졌어요. 인생 공부를 톡톡히 하고있는 셈이지요. 나만 위해 편하게 살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덤으로 사는 것이기에 힘 닿는 데까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결심하곤 해요” 언제나 그랬듯 표정이 늘 밝다. 여리고 가냘픈 모습이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결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방학 때면 한국의 교회와 대학을 돌며 강연을 했다. 시간이 될 때 찾아가 듣곤 했는데, 지선 씨는 자신의 겪은 고통과 절망이 아니라 늘 삶의 기쁨과 희망을 강조했다. ‘아, 어떻게 저토록 강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지선 씨의 낙천성과 강단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었다. 그녀는 다른 일에도 그랬듯 ‘푸르메재단 홍보대사’ 임무에도 충실했다. 강연 말미에는 장애어린이의 현실을 이야기하며 재활치료의 필요성을 잊지 않고 강조했다. 그녀의 강연에 감동한 사람들은 푸르메재단의 후원자가 되었다.

뉴욕마라톤 결승점을 앞두고 태극기를 들고 달리는 모습
뉴욕마라톤 결승점을 앞두고 태극기를 들고 달리는 모습

2009년 가을, 우리나라 장애인 몇 분과 뉴욕시민마라톤에 참가한 적이 있다. 갑자기 당한 사고와 질병으로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이 국제마라톤 완주를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고 푸르메재단이 추진 중인 재활병원 건립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뉴욕에서 공부하던 지선 씨에게 전화를 걸어 참가를 요청했다. 화상 환자는 피부로 호흡을 할 수 없기에 마라톤을 뛰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 있었지만 홍보대사로서 5㎞만 함께 달려달라고 요청했다. “사고 후 9년 동안 숨쉬기 빼고 운동을 해본 적이 없지만 열심히 달려볼게요.” 지선 씨가 대답했다.

11월 1일, 드디어 뉴욕시민마라톤이 열렸다. 화창한 가을날 아침이었다. 출발 전 지선 씨에게 “힘들면 5㎞만 갔다가 지하철을 타고 와야 해요. 절대 무리하면 안돼요.”하고 여러 번 다짐을 받았다. 이날 참가자는 4만 명이 넘었다. 오전 9시 스태튼 섬을 출발한 참가자들은 3시간 30분이 지나자 약속이라도 한 듯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맨해튼 센트럴파크 안에 있는 결승점 주변에서 나는 지선 씨가 나타나길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출발한 지 6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뉴욕의 겨울은 해는 짧아져서 오후 4시가 지나자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뛰고 힘들면 중간에 포기하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걸어서라도 완주하고 싶다”던 그녀였다. 달리다가 너무 힘들어 기숙사로 돌아갔다면 연락이 왔을 텐데…. 뉴욕의 어느 골목에서 주저앉아 울고 있거나,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누워있는지 걱정이 됐다. 분명한 것은 무언가 큰 사달이 났다는 것이었다.

2010년 한국여성젊은지도자상 수상식에서 가족과 함께
2010년 한국여성젊은지도자상 수상식에서 가족과 함께

출발한 지 7시간이 지나자 진행요원들이 결승점 주변에 놓여있던 바리케이트를 하나둘 치우기 시작했다. 꼴찌로 들어오는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던 관중들도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회 운영진이 결승선 전광판을 끄려는 순간,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하얀 점 하나가 나타났다. 그 점이 점점 커지면서 결승점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푸르메재단이라고 씌여진 흰색 티셔츠의 지선 씨였다. 어디서 링거라도 맞고 달려오는지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나는 결승점 100m 앞으로 달려가 그녀에게 태극기를 건네줬다. 지선 씨가 태극기를 흔들며 결승점으로 달려오자 자리를 떠나려던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 그녀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정말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지선 씨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그녀가 7시간이 넘는 자신과의 싸움 끝에 완주했음을 전했다. 소식을 전해드리는 나도 울고 있었고 전화를 받은 어머니도 우셨다.

지금까지 수많은 선수들이 뉴욕마라톤을 완주했지만 그렇게 감동적인 골인은 없었을 것이다. 7시간 22분이라는 엄청난?! 기록 역시 지선 씨가 유일할 것이다. 한참 숨을 고른 뒤에야 지선 씨는 늦어진 이유를 설명했다. 조금 달리자 피부호흡을 할 수 없었던 그녀에게 심장이 터질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그때부터 뛰는 것을 포기하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심장의 통증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발바닥 통증으로 다리를 절게 되었고 마침내 통증이 허리를 타고 몸으로 올라오자 너무 고통스러워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2016년 미국 UCLA대 박사학위 수여식 기념사진
2016년 미국 UCLA대 박사학위 수여식 기념사진

그때 지선 씨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한 사람을 보게 되었다.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가, 모두가 떠난 그 자리를 홀로 지키며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지선씨의 다리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포기하지 않고 응원하는 저 사람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다.’ 처음에는 정말 10㎞만 뛰어가고 지하철을 탈 계획이었다. 그런데 10㎞지점을 지났을 때 그만둘 정도로 힘들지 않아서 15㎞지점까지 가볼까 생각했고 그렇게 한 블록 걷고 한 블록을 뛰다 보니 그 다음엔 어디서 그만둘 지 결정을 하지 못해 결국 끝까지 레이스를 이어갔다. 처음부터 42.195㎞를 완주하겠다는 목표가 아니라 갈 수 있는 데까지만 가보자는 생각이 그녀를 결승점까지 이끌었다. 지선 씨는 완주메달을 목에 걸었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한발 한발 달렸더니 마침내 결승점이 보이더라구요. 아마 인생이 이렇지 않을까 싶어요.” 담담하게 말하는 지선 씨를 보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지 결국은 해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선 씨는 미국대학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밟으며 <기적의 손잡기>라는 캠페인을 벌여 푸르메재단이 국내 유일의 어린이재활병원을 짓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지선 씨는 미국 UCLA대학에서 발달장애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 현재 한동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인생은 동굴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으면 출구가 보이는 터널’이라고 말하던 이지선 교수의 도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글=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사진= 이지선 교수, 푸르메재단 DB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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