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과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푸르메재단 후원자 이야기_이철재 대표 1편


 


“아마 한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더라면 지금 생활고에 시달리며 인생을 한탄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서울올림픽의 해가 시작되던 1988년 1월 27일, 그는 미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비교적 넉넉한 집안 덕분에 두 살 아래 동생과 함께 미국 LA로 조기 유학을 떠났다. 아버지 친구 집에 머물며 인근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사고 전 친구들과 함께 (오른쪽 두 번째)
사고 전 친구들과 함께 (오른쪽 두 번째)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자동차에 올랐다. 차창 밖을 바라보던 순간 ‘꽝’하는 굉음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빠르게 달려온 뒤차가 추돌하면서 그가 탄 자동차가 전복된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가 눈을 떴을 때 응급실이었다. 여러 개 주사 바늘이 몸에 박혀 있었지만 다리를 좀 다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힘들겠지만 병원에서 몇 개월 치료를 잘 받으면 자리에서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거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사고 순간 목뼈를 크게 다치면서 가슴 아래 감각이 없었다. 몸을 혼자 움직일 수 없었다. 어느 날 주치의가 병실을 찾아 단호하게 말했다. “너는 앞으로 혼자 걸을 수도, 혼자 설 수도, 양손을 사용할 수도 없을 거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춘기 소년에게 그렇게까지 솔직할 필요가 없었지만 말이다. 18살 철재의 꿈은 그렇게 시들어가는 듯했다.


그가 사고 직후 수술을 받고 옮겨진 곳이 LA중심에 있는 랜초 로스 아미고스 국립재활병원(Rancho Los Amigos National Rehabilitation Center)이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았다는 것이 불행 중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의사의 말대로 그는 걸을 수도, 홀로 설 수도 없었다. 그는 동생에게 담배를 사오라고 시켰다. 그 당시 미국은 지금처럼 담배에 대해 엄격하지 않았다. 병실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지만 병원 내에도 흡연구역이 있었다. 친절한 간호사에게 부탁하면 침대를 병실 밖으로 끌고나가 담배를 필 수도 있었다. “재활치료가 끝나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담배를 피는 것 뿐이었습니다. 담배를 피기 위해 밖으로 나가자고 하니까 친절한 간호사들은 손을 못 쓰는 저를 위해 아예 철사로 담배를 꽂을 수 있는 장치까지 마련해줄 정도였으니까요.”

입원 생활이 끝나자 다시 통원치료로 이어졌다. 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는데도 꼬박 일 년이 걸렸다. 친구들은 모두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자신만 덩그렇게 병원에 내던져진 것 같았다.


대학시절 교정에서
대학시절 교정에서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가고 싶었던 대학에 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대학교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은 수학능력시험인 SAT(Scholastic Aptitude Test) 시험을 쳐야 한다. 미국 고교생들은 우리로 치면 고교 2학년 때와 3학년 1학기 때 SAT 시험을 쳐서 그중 높은 점수로 원하는 대학에 지원할 수 있다. 그도 다행히 사고나기 전 SAT시험을 치르긴 했지만 1월에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마지막 학기를 이수하지 못했고 졸업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스탠퍼드대를 지원했다. SAT점수와 함께 사고로 고교 마지막 학기를 이수하지 못한 이유를 에세이로 적어 함께 보냈다. 기대를 했는데 결과는 거절이었다. 고교졸업장과 학과이수증명서가 있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답변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버클리대 입학처 주소를 찾아 관련서류를 보냈다. 다행히 버클리대에서는 고교 졸업을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특수한 사정이니 직접 이곳에 와서 구두 면접을 볼 수 있느냐는 답장이 왔다.


동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640㎞를 달려갔다. “만약 우리 학교에 입학한다면 무엇을 전공하고 싶습니까?” 면접관이 물었다. “뉴런 사이언스(신경과학)을 전공해 저처럼 신경조직이 파괴된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것을 돕고 싶습니다.” 그는 왜 자신이 이 대학에 진학해야 하는지,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열정적으로 설득했다. 이번에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버클리대는 기적처럼 그를 받아들였다. 이런 배경에는 1960년대 미국의 반전, 언론자유, 장애인 인권운동의 중심지로 역할을 한 버클리대의 진보적인 학풍이 크게 작용했다. 실제로 전신마비의 중증장애라는 이유로 두 번의 거절 끝에 1962년 호흡기를 단 채 버클리대에 입학한 에드워드 로버츠(1939~1995)는 버클리대와 샌프란시스코를 장애인 천국으로 만들었다.


장애인 집회에 참가한 에드워드 로버츠와 그를 기념해 버클리대 근처에 세워진 에드워드 센터
장애인 집회에 참가한 에드워드 로버츠와 그를 기념해 버클리대 근처에 세워진 에드워드 센터

로버츠가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를 요구하며 세계 최초로 장애인 권익운동을 시작한 곳이 바로 버클리대였다. 지금은 일상화된 휠체어 경사로와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 장애인 전용 화장실 등은 그의 투쟁의 결과이다. 로버츠가 이곳에 처음으로 장애인 자립을 지원하는 독립생활센터(Center for Independent Living, CIL)를 세우자 미 전역으로 확산돼 현재는 미국에만 400개가 운영되고 있다.


로버츠는 이후 캘리포니아주의 재활국장으로 임명돼 장애인 권익을 위해 일했다. 그의 장애인 차별철폐와 경제적 지원 주장은 1990년 제정된 미국 장애인법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국 내 가장 진취적인 지방정부인 샌프란시스코와 사회변화를 주도하는 버클리대의 정신은 이후 스탠퍼드와 함께 구글과 애플, 인텔, 페이스북 등 세계적인 IT기업을 탄생하는 결과를 낳았다. 버클리대의 이런 저력이 중증장애를 가진 이철재를 학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에 들어섰다.


*글=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사진=이철재 대표, 에드워드 센터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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