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이름으로 안아주세요

푸르메재단 후원자 이야기_소설가 박완서 2편


 


박완서 선생님은 이메일로 인연을 맺게 된 동생과 푸르메재단을 끔찍이 사랑해 주셨다. 나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살아오신 고통과 갑자기 막내아들을 잃은 어머니로서의 아픔이 장애어린이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됐다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의 박완서 선생님
젊은 시절의 박완서 선생님

매달 25일 되면 푸르메재단 통장에 ‘박완서’라는 이름이 꼬박꼬박 찍혔다. 책을 새로 출간하시거나 연말이 되면 적지 않은 금액을 따로 보내셨다. 일 년에 두세 번 직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재단 사무실에도 오셨다. 그날은 우리에게 즐거운 회식 날이었었다. 장애어린이와 부모님들이 소풍가는 날에는 당신도 함께 하셨다. 마이크를 잡은 선생님은 왜 주부로 살다가 글을 쓰게 됐는지,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말씀하셨다. 특히 어머니들에게 “장애는 불편한 것이지만 우리의 의지를 막을 수 없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우리 아이들을 안아달라”고 강조하셨다.


얼마 전 이메일함을 정리하다가 박완서 선생님이 보내신 편지를 발견하고 생각에 잠겼다. 보내신 날짜가 2010년 8월 22일 저녁 6시 28분으로 되어 있었다.



백경학 선생님께


즐거운 이메일 받고도 답신이 늦었네요. 올여름은 끝날 듯 끝날 듯 안 끝나는 참으로 지겨운 여름이었지요. 저는 5월 말경 집 계단에서 굴러서 왼쪽 다리 발등에 금이 가서 6월 한 달 동안이나 왼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지냈습니다. 깁스만 떼어내면 날아갈 듯 자유로와질 줄 알았는데 깁스 떼고 의사도 잘 붙었다고 하는데도 한동안은 보행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지금 거의 다 나아 며칠 전에는 휴가도 다녀왔습니다. 그래도 아직도 몸의 균형이 잘 잡히지 않고 정신적인 후유증도 남아 있습니다. 계단만 보면 무서워서 전철 같은 건 탈 엄두를 못냅니다.


초대 감사합니다. 예쁜 집 사진도 잘 보았습니다. 마당이 딸린 주택에 가보고 싶군요. 이 더위가 완전히 가시고 저도 걷는데 더 자신이 붙고 난 9월 중순경이나, 아니면 추석 지나고 나서 날을 잡으면 어떨런지요. 그 무렵 우리 서로 다시 연락하도록 해요.


내일부터는 이 더위가 물러나리라는 예보가 나온 날

아치울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이메일 주소는 "wansuh" <wspearl31@hanmail.net>로 되어 있었다. 이메일을 받아 보니 여든 살 가까운 노인이 컴퓨터를 사용하신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선생님은 진주처럼 빛나길 원하셨는지 이메일 주소를 <완서의 약자인 ws와 진주인 pearl, 그리고 태어난 해인 1931년>으로 하셨다.


아치울 마을에 있는 노란색
아치울 마을에 있는 박완서 선생님의 노란 집

당신은 어릴 때부터 정신을 딴 데 두고 걷다가 자주 넘어져 다쳤다고 한다. 또래 꼬마들이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뛰어다니는데 비해 어쩌면 당신에게 걷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당신은 작은 돌부리에도 곧잘 넘어진 것이 세상살이에 서툰 증거라고 말씀하셨지만 여든에 가까운 연세에도 컴퓨터와 이메일을 사용하실 정도로 진취적인 ‘얼리어댑터’였다.


다리를 다쳐서 우리 집 초대에 응하기 어렵다는 편지를 받고 가을이 깊어갈 무렵 선생님 댁을 찾았다. 오랫동안 보문동 전통 기와집에 사셨던 선생님은 따님들의 간곡한 권유로 처음으로 아파트로 이사했지만 갑갑해 견디지 못하셨다. 지금은 구리시 아차산 자락에 마당이 있는 아담한 목조주택을 지어 살고 계셨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대로 아치울 마을에서 노란색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벨을 누르자 한참이 지나 선생님이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나타나셨다. “아직 다리가 성치 않아 걷는 것이 힘들어요. 하지만 놀 수 없어서 소일삼아 잡초를 뽑고 있어요. 가을볕에 얼마나 잡초가 잘 자라는지 내년 봄이 걱정이에요. 일주일만 한눈 팔아도 잡초밭이 되어버리네요. 정말 잡초의 생명력을 실감해요.”


절뚝거리며 걷는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자 거실에는 마당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유리 통창이 놓여 있었다. 창가에는 정성스럽게 키우고 있는 양란 화분들이 가을 햇살을 받고 있었다. 빼꼼이 열린 서재에는 방바닥부터 천장에 닿을 정도로 책들이 쌓여 있었다.


박완서 선생님의 서재. 손을 찍은 사진액자와 컴퓨터가 눈길을 끈다.
박완서 선생님의 서재. 손을 찍은 사진액자와 컴퓨터가 눈길을 끈다.

선생님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내년 봄 잡초가 기승을 부릴 무렵 다시 와서 마당의 잡초를 모두 뽑아드리겠다고 내가 큰소리를 쳤던 것도 기억난다. 댁을 떠나기 전 박완서 선생님이 물었다. “멀리 오셨으니 제가 책을 선물하고 싶어요. 제 책 중 무슨 책을 갖고 싶으세요.”


1970년대 출간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를 시작으로 『휘청거리는 오후』, 『창밖은 봄』, 『배반의 여름』, 『목마른 계절』, 『엄마의 말뚝』), 『오만과 몽상』,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미망(未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많던 싱아는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너무도 쓸쓸한 당신』 등 수많은 소설과 에세이 중 나는 단연 1970년 첫 작품인 『나목(裸木)』이라고 말씀드렸다. 어려웠던 시절 누구나 벌거벗은 몸으로 6.25 전쟁의 추위를 견뎌야 했던 ‘나목’이 단연 선생님을 대표하는 작품이니까.


다섯 남매 중 막내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선생님은 6.25 전쟁 때를 기억해 힘들고 가난했던 시절 박수근 화백과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봄을 기다리는 나목에 비유해 소설을 쓰셨다. 여성동아 공모소설에 당선돼 불혹의 나이에 소설가로 등단하게 된 작품이다.


박완서 선생님께서 친히 첫 작품에 사인까지 해주셨다. 귀한 선물을 받고 돌아와 잡초를 뽑으러 갈 봄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부음을 받았다. 선생님 댁을 다녀온 지 온 불과 석 달만이었다. 2011년 1월 엄동설한의 추위 속에 선생님께서는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팔순의 연세에도 펜을 놓지 않으시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맥주잔에 소주를 콸콸 따라 드시던 선생님. 박완서 누님께 술 한 잔 따라드리며 지혜로운 말씀과 다정한 위로를 들을 날을 기다렸지만 그날은 오지 않았다. 박완서 선생님의 사진이 푸르메재단 회의실에 걸려있다. 7월 초록의 햇살 아래 이지선 교수와 나란히 웃고 계신다.


*글=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사진= 푸르메재단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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