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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 선 장애인 캠페인] 노동주 감독, 나는 카메라로 희망과 꿈을 포착한다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나는 카메라로 희망과 꿈을 포착한다

(22) 시각장애 안고 다큐 찍는 노동주 감독

» 시각장애인 다큐멘터리 감독 노동주씨.

저는 힘보다 사랑을 믿는 ‘평화주의 시각장애인 감독’ 노동주입니다. 저는 시각장애인 1급으로 빛과 어둠 정도만 구별할 수 있는 전맹(全盲)입니다. 전봇대와 사람 이 있으면 누가 사람이고 전봇대인지 모릅니다. 움직이는 모습을 어렴풋하게 감지하면 ‘아, 사람인가보다’ 생각할 수 있는 정도죠.

제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당신이 고용주라면 시각장애인을 고용하시겠습니까?’가 TV에 방영이 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제가 겪었던 고용차별 이야기를 소재로 충분히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든 다큐보다 제 존재가 더 큰 관심을 받은 것 같아요. 시각장애인이라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영상제작을 하는지 궁금해 하시는 분들도 많았죠.

제가 왜 카메라를 들게 됐는지 아세요? 저는 중도장애인이에요. 처음부터 세상의 밝은 빛을 보지 못했던 게 아니에요. 제 시신경이 마비되어 시력을 잃고 삶의 고통 속에서 절규할 때, 다시 제 꿈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영화감독이 되는 게 꿈이었어요. 장애를 갖기 전에는 영화가 좋아서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면 이제는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아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어요.

지독한 절망 속에서 잊었던 꿈을 되살리다

» 장난기 가득한 노동주 감독의 3살 때 모습.

저는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복덩어리로 불렸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날, 아버지가 회사에 입사하셨기 때문이죠. 부모님은 남들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착한 심성을 지니셨는데, 저 또한 부모님의 모습을 배웠던 거 같아요. 지하도를 지나다가 앉아있는 걸인에게 손목시계며 목도리를 풀어주기도 했죠.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도 아버지 영향이 컸던 거 같아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께서 비디오를 사오셨는데, 이틀에 한번 꼴로 영화테이프를 빌려오셨어요. 아버지와 함께 감상했던 고전영화는 제가 소중하게 간직하는 우리 시절 추억 중에 하나에요. 그렇게 저는 영화를 빠져들면서 감독의 꿈을 키우게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제작의 꿈을 아버지께 말씀드렸는데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영화 제작에는 많은 돈이 필요한데 우리 집안에는 그만한 돈이 없다. 동주야, 네가 먼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갖는 것이 어떻겠니? 그런 후에 영화제작을 하렴.”

저는 그 말씀에 곧바로 돈을 많이 버는 계획을 세웠었지요.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해서 전교 1등을 하기도 했구요. 중학교 때부터 친구들에게 미래에 내가 영화를 만들면 투자해달라고 설득하기도 했어요. 참, 꿈 많은 어린 소년이었죠. 하지만, 그 꿈이 그리는 나의 모습은 분명했습니다.

온가족에게 찾아온 끔찍한 고통의 나날

행복한 가정에서 영화감독을 꿈꾸던 평범한 소년에게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제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입니다.

착실하고 뭐든지 열심히 하던 형이 어느날 갑자기 자살기도를 했습니다. 그 후로 집안에 웃음소리는 사라지고 울음소리만 늘어갔어요. 형의 병명은 강박장애와 우울증이 섞인 것이었는데, 저는 형의 행동에 늘 불안감을 느껴야했어요.

그리고 2년 뒤, 이번에는 저에게 뜻밖의 병마가 찾아왔습니다. 갑자기 눈앞에 비치는 사물들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어요. 광주에 있는 병원을 찾아 다녀 봐도 도통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한창 공부하며 뛰어놀아야할 나이에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저는 나중에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희귀성 난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다발성 경화증’은 시각과 감각, 팔다리의 움직임과 관련된 신경전달에 이상이 생겨서 영구마비까지 갈 수 있는 무서운 병인데, 아직 정확한 원인도 모르고 치료법도 없다고 합니다.

저는 치료를 위해 학교를 자퇴하고 2년간의 병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늘 제 곁에서 병간호를 해주시던 부모님이 가끔 남몰래 우시는 모습을 보며 저는 속으로 피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부모님의 얼굴에서 눈물을 거두어 드리리라. 반드시 나는 일어설 것이다.’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2년 만에 병원 문을 나섰습니다.

꿈꾸던 대학생활, 그러나 슬픔은 ‘현재진행형’

» 대학 시절 스킨스쿠버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한 노동주 감독.(왼쪽에서 세 번째)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보면서 저도 빨리 대학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저는 퇴원 후에 검정고시 공부 6개월 만에 고등학교 과정을 통과하고 조선대학교 환경공학과에 당당히 들어갔습니다.

2년의 공백을 만회하기 위해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학과 대표를 맡으면서 연극동아리에서 공연준비도 하고,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스킨스쿠버 동아리 생활도 했죠. 열심히 하는 만큼 보람찬 대학생활이었어요.

그러던 중, 대학2학년 때 갑자기 왼쪽 눈의 시력에 이상이 생겨서 병원을 급하게 찾았고 다발성경화증이 재발한 것을 확인하게 됐어요. 제 머릿속에서 힘겨웠던 지난 병원생활과 부모님께 또 불효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요. 다시 병원생활을 할 생각을 하니 두렵기도 했죠.

혹시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고통이 어떤 느낌인지 아세요? 다발성경화증이 제 시각을 마비시켜 언젠가는 이 세상을 볼 수 없다는 너무나도 확실한 사실, 그리고 이 모든 게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현재진행형이라는 현실은 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어요.

시간이 갈수록 왼쪽 눈의 시야는 좁아졌고 결국 왼쪽 눈을 실명하게 됐습니다. 나머지 눈에도 이상이 올 거라는 의사선생님의 말을 듣고 더 이상 병원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어요. 남은 한쪽 눈으로라도 남들보다 더 많은 세상을 느끼고 싶었습니다.

눈 먼 사람에게 라파엘 천사의 기적을…

처음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을 때,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찾아왔는지 신에게 물어보고 싶었어요. ‘도대체 왜 나일까, 내가 무엇을 잘못 한 걸까?’ 가혹한 벌을 받는 기분이 들었죠.

제가 시각장애인이 된 사실을 알게 된 수녀님은 눈물을 흘리시며 제 세례명인 라파엘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라파엘 천사는 치유천사로서 ‘눈 먼 자의 눈을 띄운 천사’라는 이야기를 듣고 내 장애의 의미와 목적을 깨달았어요.

‘비록 내가 눈이 보이지 않지만 라파엘 천사처럼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천사가 되자.’

그 후로 저보다 더 어려운 친구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비록 사물을 바라보기는 힘들었지만, 저처럼 장애가 있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제 마음에 선명하게 들어왔어요. 저는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이 광주 엠마우스복지관에서 생활하는 지적장애인의 사회적응을 돕는 봉사활동이었습니다. 이 친구들과 생활하면서 제 장애는 이들에 비하면 너무 사소하게 느껴졌어요.

암으로 쓰러져가는 가족들

» 부모님과 함께 보길도 여행을 떠난 노동주 감독.

저는 부지런하게 봉사활동을 하면서 대학전공을 살려 취업을 빨리할 마음으로 자격증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영어, 컴퓨터, 한자 자격증을 하나 둘 취득하면서 취업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죠. 그런데 그 무렵 집안에 다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어요. 어머니의 위암 판정 소식. 가족을 위한 기도만 하셨지 정작 본인은 희생만 하셨던 나의 어머니가 암에 걸리다니……. 다행히 수술을 하셨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너무 고통스러워 하셨어요. 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아 취업전선에 뛰어 들었습니다.

제가 기업체에 원서를 쓸 무렵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아버지마저 폐암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아프면 나머지 식구들도 걱정에 휩싸이는데, 우리 식구 네 명 모두가 환자라는 사실에 저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싶었어요. 저는 성당 예배당에서 매일 눈물을 흘리고 신을 원망했어요.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제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시나요?’

식구들 모두가 아프니 마땅히 하소연할 곳도 없는 저를 위해 수녀님은 함께 울어주셨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독하게 먹었어요. ‘오뚝이가 되자, 쓰러지고 또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자!’

토익 980점에도 안마사가 될 수밖에 없는 현실


» 세광 학교에 입학해 안마 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

하루라도 빨리 취업에 성공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서류심사를 통과하고, 정장차림으로 잔뜩 신경을 쓰고 면접을 봐도 불합격 통보만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죠. 바로 제 장애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시각장애인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안마사 자격을 취득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토익 980점, 각종 자격증, 내가 했던 모든 경험은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전혀 고려되지 않았어요. 주변에서 ‘시각장애인은 안마사로 살아가야 한다. 안마를 배워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저는 맹학교인 광주 세광학교에 입학 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어린 친구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안마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장래희망을 물어보니 비장애 어린이들과 똑같이 다양한 장래희망을 가지고 있었어요. 저보다 재능 있고 특출 난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 겪게 될 시련이 떠올랐죠.

저는 이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꿈을 펼치기 어려워 결국 안마사가 될 수밖에 없는 시각장애인의 현실을 영상에 담기로 했습니다.

희망과 꿈을 담는 영화감독이 되자

마침 저는 광주시청자미디어 센터에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라디오 제작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센터 제작지원팀장님에게 영상을 제작하고자 하는 의지를 말씀드렸죠. 제 이야기를 듣고 센터 제작지원팀장님은 믿기지 않으셨던 거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 시각장애인이 시각매체인 영상작업을 그것도 촬영에서부터 하겠다니 말이죠.

» 노동주 감독이 다큐 주인공 한나, 제윤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저는 제가 만들 영상의 기획의도를 말씀드렸고 영상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육을 받고나서 제 첫 작품인 ‘당신이 고용주라면 시각장애인을 고용하시겠습니까?’를 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장애인이었으면 2~3컷이면 끝낼 장면을 20~30컷 찍어야 했고, 근거리 촬영은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원거리는 상이 잡히지 않아 어려웠어요.

그래서 연락하게 된 친구가 중학교 동창인 성룡이에요. 시각장애인이 된 후 친구들과 연락을 끊었는데 이 친구는 나에게 계속 연락을 해 준 친구입니다. 이 친구는 고맙게도 흔쾌히 저를 도와주기로 했죠. 국내최초, 어쩌면 세계최초 시각장애인 다큐멘터리 팀이 결성되었습니다. 기획안이 이미 짜져있기 때문에 계획대로 일이 빠르게 진행됐어요.

촬영 내내 설레이는 마음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어요. 제 영상에 사회의 장벽과 시각장애인들의 장래희망을 대비시켜서 그려보았죠. 라디오 디제이가 꿈인 한나와 클라리넷 연주가가 꿈인 제윤을 주인공으로 제 영상에서나마 꿈을 이뤄가는 과정을 그렸어요.

제가 만든 영상으로 ‘시각장애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저는 희망과 꿈을 담는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어요. 제 모습을 보고 시각장애인도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거든요.

까마득한 현실의 장벽 넘어 희망을 본다

» 중학교 동창인 성룡씨가 없었다면 노동주 감독이 다큐를 만들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저는 지금 다니던 학교도, 광주시민미디어센터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위암에 걸린 어머니는 다행히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지만 폐암에 걸린 아버지는 독한 항암치료 때문에 오늘도 음식을 못 드시고 계세요.

제가 아버지 손발이 되어드리고 싶지만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오히려 간병하는데 방해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버지 손을 잡아 드리며 제 몸에 온기를 전해드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저는 매일 기도해요. 아버지와 어머니, 형이 낫게 해달라고요. 그리고 하루 빨리 제가 취업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어요.

저는 지금도 계속해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어요. 영화감독이 제 꿈이지만 당장 살아가려면 돈을 벌어야 해요. 전공을 살려서 취업을 하고 싶지만 제 전공분야는 눈이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취직이 힘들 거 같아요. 그 대신 점자정보단말기로 문서를 입력하고 읽을 수 있어 거뜬히 일반사무직 업무를 할 수 있어요.

제가 다큐를 통해 시각장애인의 현실을 알렸지만 여전히 현실의 장벽은 너무 높게 솟아있는 것 같습니다. 한순간에 바뀔 수 없다는 것을 저도 잘 알아요. 그래서 저는 카메라를 놓지 않을 거예요. 지금은 ‘거짓말도 보여요’라는 다큐를 찍으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앞을 보지 못해서 속임을 당하는 일이 많거든요. 이런 이야기들을 제 영상에 담을 거예요. 저에게 병상에 누워계신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인생은 숲이 우거진 비탈진 산길을 오르는 것과 같다. 숲을 헤쳐 나가다 보면 바윗길도 가시덤불 길도 때로는 꽃길도 만나는 것이다. 지금 네가 걷는 길이 아무 리 힘들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자.”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언젠가 밝은 빛이 저에게 비출 것이라고 굳게 믿어요. 저는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아요.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에 너무 힘들어서 지쳐 쓰러져 울고 싶은 분이 있다면 제 아버지가 했던 말을 기억해주세요. 당신은 꽃길을 걷기 위해 잠시 잠깐 가시덤불 길 위에 서 있을 뿐이에요. 힘을 내세요.

*정리=임승경 푸르메재단 간사

 <프로필>

  • 1983년 전라남도 광주 출생
  • 2000년 광주 고려고등학교 입학
  • 2001년 다발성경화증 발병으로 고등학교 자퇴
  • 2007년 조선대학교 졸업
  • 2008년 광주세광학교 입학
  • 2008년 다큐 ‘당신이 고용주라면 시각장애인을 고용하시겠습니까?’ 제작 (KBS 열린채널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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