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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 선 장애인 캠페인] 차인홍, 기적은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한겨레-푸르메재단 공동캠페인 <희망의 손을 잡아요- 우뚝 선 장애인>

기적은 만들어 가는 것이다

(20) 휠체어 탄 바이올리니스트 차인홍 교수

» 휠체어 탄 바이올리니스트 차인홍 교수

상처 없는 사람이 있을까?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경쟁시대에 살고 있다. 그로 인해 저마다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 상처의 크기가 어떻든 그것이 꿈과 희망의 원동력이 되는 경우도 있고 좌절의 늪으로 가는 지름길인 경우도 있다.

차인홍 교수(50)는 생후 1년 만에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를 얻었다.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아홉 살 되던 1966년 부모의 곁을 떠나 대전에 있는 낯선 재활원으로 보내진다. 그 삶의 무게를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휠체어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는 서먹서먹한 환경. 새벽에 잠이 깨 창문 사이로 떠오른 둥근 달을 보고 있노라면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임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소년은 스스로 강해져야만 했다. 재활원에서 처음 바이올린을 잡은 소년은 30년 뒤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라이트주립대학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겸 교수가 되었다.

첫 번째 기적 : 바이올린을 만나다

길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했던가. 차 교수가 바이올린을 처음 잡았던 ‘사건’은 너무도 우연히 찾아왔다. 대전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했던 서울대 음대출신의 강민자 선생님이 우연히 재활원 앞을 지나다 몸이 불편한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줘야겠다고 마음먹은 강 씨는 얼마 뒤 재활원을 방문해 개인교습을 제안했다.

» 재활학교 졸업식 때 바이올린을 지도했던 강민자 선생님(왼쪽에서 두 번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차인홍 교수(왼쪽에서 세 번째).

장애를 가진 재활원 소속 초등학생이었던 차 교수에게 음악은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귓가를 스친 바이올린 소리는 가라앉아 있던 마음에 불을 지핀 첫 번째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쓸쓸하게 버림받은 것 같았던 존재가 꽃피어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만약 ‘음악과의 운명적 만남’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함께 바이올린을 배운 재활원생들 가운데 차 교수의 실력은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차 교수에게 바이올린은 단지 연주를 남들보다 잘 한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어떤 것’이었다. 바로 삶의 의미를 알아차리게 해준 것이었다.

그의 연주 연습은 눈물겨웠다. 당시 5,000원짜리 바이올린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이 된 것도 아니었다. 먼지 쌓인 연탄광이 그의 연습공간이었다. 손이 얼 정도로 추운 겨울에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에 매달렸다. 새벽 6시부터 시작한 연습은 주위가 완전히 캄캄해져야 끝나곤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값싼 바이올린은 값비싼 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연습한 지 1년 후 충청남도 음악 콩쿠르에 나가 1위를 차지했다. 주위에 슬슬 차 교수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통이 무거워질수록 꿈도 커진다

» 14살이던 1972년 호수돈여고 무대에 협연자로 설만큼 연주실력을 인정받았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힘겨워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재활원에서 졸업장 없는 중학과정을 마치고 1년간 일본의 한 사회복지시설에 기술을 배우러 간 일이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기술은 배운 것이 없고, 단순노동에 가까운 일만 잔뜩 하다 되돌아왔다. 국내 실정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직업을 통해 자립을 한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현실에서 그의 미래는 아직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공부를 해봐야 무슨 소용인지 의욕도 사라졌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으려고 해도 보이지 않았다. 삶을 포기하고 싶었고, 막다른 심정으로 기찻길을 찾았다. 지금껏 눌러왔던 외로움과 두려움이 한 소년의 여린 가슴 속으로 한꺼번에 몰려왔다. 두 뺨은 눈물로 번들거렸다. 그리고 저 멀리서 기차가 달려왔다. 그 순간 사랑하는 어머니와 선생님의 얼굴이 차례로 스쳤고, 철로변에서 물러섰다. 차 교수는 이때 ‘바이올린에 목숨을 걸고 한 길만 제대로 달려가자’라는 소중한 결심했다.

외로운 어린 소년은 어엿한 음악청년으로 자라났고 연습의 고통 너머에 숨어 있는 즐거움을 차차 알아갔다. 그리고 18살 되던 해 ‘은총의 샘’이라는 뜻의 베데스다 현악 4중주단의 일원이 되었다. 재활원 친구들로 구성된 이 악단은 강민자 선생님의 대학 후배였던 고영일 전 목원대 교수가 제안으로 만들어졌다.

제1 바이올린을 차 교수가 맡고, 첼로에 이종현 씨, 제2 바이올린에 이강현 씨, 비올라에 신종호 씨였다. 이들 4명은 따로 모여 끊임없이 연습을 해 나갔고, 일반 연주회뿐 아니라 장애인이나 교도소 재소자들을 위한 연주회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쳐갔다.


» 2002년 유학을 마친 베데스다 현악 4중주단 ‘친구들’이 재결합해 연주활동을 펼쳤다.

두 번째 기적 : 아내와 함께 유학 떠나다

청년 시절 차 교수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차 교수 옆에서 늘 든든한 음악적 동지이자 버팀목이 되었던 사람은 아내 조성은 씨다. 그녀는 고영일 교수의 제자로 어느 부잣집 맏딸이었는데 우연히 재활원에 와서 차 교수를 만나 사랑을 키웠다. 차 교수도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자신의 장애 때문에 선뜻 먼저 다가가기 어려웠는데 하늘이 맺어준 인연인지 그녀는 당시 차 교수를 보자마자 평생을 같이 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검정고시를 통해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것도 그녀 덕분이었다. 24살까지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였던 그였다. 하루는 그녀가 검정고시를 준비하라며 책을 한 질 사들고 왔다. 대학을 다니던 아내는 차 교수에게 다른 세계를 보게 했던 것이다.

미국 유학기회를 갖게 된 것도 이 즈음이다. 평소 차 교수 등 베데스다 단원들을 눈여겨 보았던 음악계와 종교계 인사들의 추천으로 아산재단의 특별후원을 받아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음악을 평생의 업으로 삼을 수 있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 두 아들과 함께 한 차인홍·조성은 씨 부부.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신시내티 음악대학에서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라쌀(La Salle) 4중주단을 사사하고 이후 뉴욕시립대학교 브룩클린 음악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차 교수가 미국 유학길에 올랐을 때 부인 조 씨는 핸드백만 들고 함께 비행기를 탔다고 한다. 친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미국에서 차 교수와 결혼했고 그의 학업을 뒷바라지했다.

차 교수는 각고의 노력 끝에 석사학위를 따고 1988년 귀국하여 대전시향의 악장으로 일했다. 6년 동안 시향악장과 강사로 일을 하면서 집도 장만했다. 하지만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평생에 걸쳐 겨우 이루어 놓았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평온 뒤에 찾아온 시련, 그리고 세 번째 기적

절망은 또 다른 희망을 꿈꾸게 하는가? 차 교수가 귀국 후 활동하던 대전시향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당시 지휘자가 사임하면서 단원들 간에 불화가 생겼다. 얽힌 실타래는 풀릴 줄 몰랐고 갈등의 소용돌이는 깊어만 갔다. 그러던 중 정작 더 큰 일이 다른 곳에서 터졌다. 악기상을 하던 절친한 친구가 관세법 위반으로 구속됐고, 보증을 서 주었던 차 교수는 그 사건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차 교수는 악장직을 뒤로하고 다시 미국행 비행기에 빈털터리의 지친 몸을 실었다. 1994년 그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 입학하여 지휘분야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박사과정 때 생활은 그 이전 생활보다 더욱 가혹했다. 아내는 바느질을 해서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첫째 아들이 태어난 기쁨도 잠시, 극심한 마음고생에 불면의 밤을 지새웠다. 떳떳한 가장으로 설 수 없었다. 박사 과정을 겨우 끝낸 차 교수는 한동안 기도를 통해 자신을 담금질했다. 힘들 때마다 자신이 처음 바이올린을 연습했던 연탄광 시절을 떠올렸다.

» 라이트주립대 총장(오른쪽) 및 음악대학장과 함께.

다시 미국에 건너간 지 2년 반 만인 1996년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1년쯤 뒤에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학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교수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났다. 지휘와 현악4중주 경험이 있어야 했다. 그 동안 차 교수가 쌓아 올린 연주 경험과 대학에서 ‘지휘’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준비한 자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서류를 내고 3박4일 동안 오케스트라 리허설, 독주회 등 철저한 테스트를 거쳐 마침내 차 교수는 라이트주립대학의 조교수로 발탁되었다. 능력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교수로 정식으로 발탁이 되고 나서 차 교수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유니버시티 앤 커뮤니티 오케스트라’가 바로 그것이다. 학교 내 학생이 절반 나머지는 지역의 일반인들로 구성이 된 오케스트라였다. 차 교수는 늘 배움의 자세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교수 생활 3년째에는 대학 음악과 과장으로부터 최우수 교수로 추천을 받기고 했다.

그는 비록 교수로 재직하고 있지만 장애인을 위한 자선 음악회를 활발하게 하고 있으며 방학을 이용하여 한국과 일본 등에서 많은 음악회를 벌이고 있다. 또한 헝가리부다페스트 실내악단을 비롯해 저명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일정이 빼곡하다. 2006년에는 스웨덴의 대중가수 레나 마리아(Lena Maria) 와 함께 미국 서부와 동부에서 순회 연주를 함께 공연하는 등 음악적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2006년에는 이 같은 활발한 활동을 높이 평가받아 유공재외동포상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좋은 음악으로 평생 ‘사회 환원’하겠다

» 2001년 대전예술의전당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는 차인홍 교수.

스스로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차 교수는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게 좋은 롤 모델이 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늘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고 있다. 그 동안 받아 온 은혜를 이제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그가 앞으로 할 일 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 길을 가는 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헛된 명성보다는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좋은 음악가가 되는 것이다.

38년 된 병자가 예수를 만나 기적이 일어났던 것처럼 차 교수도 그 동안 살아오면서 기적과 같은 일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준비하고 매순간 노력한 결과이지 결코 우연히 찾아온 행운만은 아니었다. 언제나 배우는 자세를 잃지 않았고, 한 곳에 집중하면 무서울 만큼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의 자서전(『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 제목처럼 그는 ‘성공’이라는 목표보다는 늘 진지하게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려고 노력해온 사람이었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 하고 굽힘없이 미래를 준비하는 차인홍 교수의 삶이 일상에 지치고 희망을 잃어가는 우리 시대에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 차인홍 교수님 프로필

  • 1958년 대전 출생
  • 1967년 재활원 입소
  • 1970년 초등학교 4학년 때 바이올린 배우기 시작
  • 1971년 충청남도 음악콩쿨대회 1등
  • 1976년 베데스다 현악4중주단 창단
  • 1982년 미국 신시내티음악대학 유학
  • 1986년 뉴욕시립대학교 브룩클린음악대학 석사(바이올린)
  • 1988년 대전시향 악장 취임
  • 1996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 박사(지휘)
  • 1998년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학 교수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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