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말아요! 캠페인] 원희룡,너희는 항상 기억하라.


“너희는 항상 기억해라. ‘하늘의 영광, 땅에는 평화’ 누가복음의 이말씀 처럼 반드시 인류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돼라” 이 말씀은 아버지가 내게 항상 하시던 말씀이다. 농사와 신앙으로 일생을 사셨던 나의 아버지(원응두)는 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은 없지만 내 신앙만은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다고 늘 말씀하셨다.



나의 어린 시절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못했고 가난했지만 아버지는 항상 보다 큰 가치, 즉 인류의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많은 자유를 주셨다. 원대한 목표만 주셨을 뿐 거기에 이르는 과정만은 우리의 몫으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묵묵히 지켜

봐 주시는 마음이 나에게는 든든한 힘이 되었다. 내 삶의 어려운 순간에, 그리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시점에 나는 항상 나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학력고사 전국수석을 하고 ‘제주의 아들’이 되어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적어도 당시에는 부모님께 자랑스런 아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대 총장님과 법학과 지도교수님이 케이크를 들고 제주도의 부모님을 방문했다. 아무 영문도 모르던 부모님은 귀한 손님을 반갑게 맞았다.


그런데 총장님과 교수님이 불쑥 아버지의 손을 잡고 부모로서 올바른 지도를 부탁한다고 뜻 모를 당부를 하는 게 아닌가. 아버지로서는 뒤통수에 벼락을 맞은 기분이셨을 것이다. 그야말로 전국수석에 빛나는 훌륭한 아들이 창졸간에 수배를 받고 있는 문제운동권 학생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가 학교로부터 유기정학 처분을 받은 후 공단에서 야학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계셨던 부모님이 큰 충격을 받으셨다.


“군대를 보내십시오. 어차피 다녀와야 할 곳이고, 원 군에게도 그 편이 좋을 겁니다.” 청천벽력 같은 총장님의 말씀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게 분명했다.


자식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았던 아버지. 아버지는 뜬 눈으로 밤을 새다가 다음 날 당장 첫 비행기를 타셨다.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무작정 단행한 서울행이었다. 한나절 동안 교문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시던 아버지는 끝내 등교하는 아들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교정 안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도서관이며 기숙사, 식당, 연구동 건물들을 샅샅이 훑고 돌아다녔다. 어디서도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지금도 그때 본 교정 곳곳의 건물들을 헤아리며 다 기억해 내신다.


아버지는 내 친구를 통해 내가 있는 곳의 위치를 알아내서 한달음에 그 곳으로 찾아 오셨다. 아버지가 찾아낸 공단 한쪽의 창고는 야학 임시교실로 사용하고 있던 장소였다. 창고 한 구석엔 망가진 사무용 책걸상이 산처럼 쌓여 있고 천장은 여기저기 뜯겨 나가 수시로 쥐가 들락날락 하는 후미진 곳이었다.


아버지는 가만히 창고 안을 둘러 보셨다. 그러다 벽에 붙어 있는 시간표에 시선이 멈췄다. 곧 학생들이 들이닥치고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당신은 당황해서 황급히 구석에 있는 책상을 밟고 천장으로 올라가셨다. 환기구도 없는 창고의 천장 위에는 거미줄과 쥐똥만 가득했다.


수업이 다 끝나갈 무렵 나는 천장에서 바스락 대는 소리를 들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제주 중문의 과수원에 계실 아버지가 구로공단 후미진 창고의 천장 위에 계시리라고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그제서야 슬며시 천장에서 내려오셨다. 그리고 바로 제주도로 내려가셨다. 당신은 아들이 행여 잘못된 주체사상 같은 것에 경도되어 섣부른 사회주의자라도 되어 있을까봐 걱정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가르친 것이 잘못된 사상이나 주장이 아닌 보편적이고 건강한 지식이라는 것을 알자 마음이 놓였다고 하셨다.


당신은 행여 아들의 마음이 약해질까 봐 눈길 한번 마주하지 않고 그 길로 고개를 끄덕이며 제주도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몇 년 뒤 고시에서 다시 수석합격을 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을 때, 찾아 온 기자들에게 아버지는 그날의 일화를 들려주셨다. 나도 그 때 처음 들은 이야기였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아들이 학생운동을 하고 있었던 당시의 심정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버지는 담담히 대답하셨다. “그저 뒤에서 가만히 살피기만 했지요” 그것이 부모로 해 준 전부라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셨다. “기도로 키웠습니다.”


지금 나 또한 자식을 키우는 아비의 입장에서 나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기도로 자식을 키우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항상 하시던 말씀처럼 인류를 위해 내가 어떻게 최선을 다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원희룡
1982년

대학입학 학력고사에서 전국수석으로 서울 법대에 입학했으나 신군부에 반대해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수배와 유기정학 처분으로 야학생활 등 사회변혁운동에 뛰어들었다가 뒤늦게 사법고시에 수석 합격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검사와 법무법인 춘추 변호사를 거쳐 16대 국회에 출마해 현재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2004년 세계경제포럼(다보스 포럼)이 선정하는 차세대 리더 (young global leader)로 뽑힌 뒤 세계 지도자가 참석하는 이 포럼에 매년 참석하고 있다. 14대째 제주도에 살고 있는 토박이 집안 출신으로 대입과 사법시험에 수석을 차지해 제주도의 신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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