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 결혼과 세가지 약속

특별한 약속이 필요 없었다. 약속하고 만날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학교 앞 막걸리집에서 거의 매일 만났다. 같은 써클이나 학과는 아니었지만 ‘노는 물'이 같았기 때문이다. 막걸리 잔을 기울이면서 “녹두장군 말달리는 호남 벌판을...” 함께 불렀다. 역사를 논하고 시대를 고민했다. 촌놈으로 서울 올라와 대학생활 적응하느라 어영부영 지낸 1학년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그렇게 함께 절친한 친구로서 대학 4년을 보냈다.



▲ 한겨레신문 김종철 논설위원


딱 한번 ‘막걸리 궤도'를 벗어난 적이 있다. 대학 4학년 중반쯤 어느 날 그녀는 내게 프로포즈 비슷한 걸 했다. 그날도 막걸리를 한 잔 했던 것 같다. 잠시 보자는 그녀를 따라 근처 놀이터 벤치에 앉았을 때 쭈뼛쭈뼛하던 그녀가 “나는 네가 좋다”고 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개인적인 연애를 즐길 만한 시대가 아니라는 생각도 평소 하고 있었지만, 그때 나는 맘 속으로 다른 여학생 후배를 좋아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도 잘 아는 후배였다. 그래서 선뜻 그녀의 고백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네가 그러는 줄 몰랐는데...”라며 말꼬리를 감출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부담 갖지마.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일 뿐이고. 부담스러우면 없었던 일로 하자. 됐지. 가자”라며 그녀는 나를 달랬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말 신통하게도 그 후로 그녀는 정말로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나를 대했다.


군 시절 휴가 때 다른 친구들이랑 한두번 만났지만, 학교 선생님이 된 그녀는 군인 친구에게 전혀 살갑게 굴지 않았다. 워낙 오래 된 친구 관계여서 제대 이후에도 그럭저럭 가끔 만났다. 그 뒤 나도 일자리를 얻고 생활인이 되면서 여러 면에서 여유가 생겼다. 가끔씩 서로 만나면서 애틋한 정이 자연스럽게 싹텄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약속했다.


편안했던 친구에서 부부로 관계가 바뀌었다. 결혼하면서 친구와는 다른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고 서로 느꼈다. 부부가 된 뒤에도 예전의 동갑내기 친구의 관계를 유지하다가 별 일 아닌 사안으로 자주 다투고 결혼생활이 악화돼가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우리의 결혼을 잘 ‘관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로가 무조건 또는 절대적으로 미워져서 함께 살기 힘들어지지 않는 한 덜 다투고 아름답게 살기로 다짐하면서 세가지를 약속했다.



▲ 칠면조 요리를 하고 있는 김종철 논설위원과 부인 정연씨


첫째는 호칭이었다. “종철아!” “연아!”로 입에 굳은 너나들이 호칭을 “여보 당신”으로 바꾸고 서로 항상 존댓말을 쓰기로 했다. 평등한 부부의 출발점은 상호 존중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첫 일주일은 정말 어색하고 힘들었다. 양가 어른들 앞에서 “여보 당신”하는 게 쑥스러웠다. 더구나 둘 다 너무나 잘 아는 친구들을 만날 때는 더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야! 너! 하다가 친구들 앞에서 서로 예! 예! 하자니 마치 연극놀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호칭의 변화와 존댓말 사용은 다툴 때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주는 좋은 방패가 됐다. 예컨대 “네 맘대로 해!”라는 말은 쉽게 할 수 있어도 “당신 맘대로 하세요!”는 말하기 어색하기 때문이다. 싸우더라도 막말이 줄고 언어에 절제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상처가 덜 생기니 화해하기도 쉬웠다.


둘째는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절대로 잠자리에서 등을 돌리고 자지 않는 것이었다. 사소한 일로 다투고 난 뒤에 한사람이 방을 나가버리거나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등을 반대편으로 훽 돌릴 때 받는 마음의 상처가 원래 싸움의 그것보다 더 크다는 것을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다. 함께 사는 것이 익숙해질 때까지 이런 저런 사소한 일들과 오해들로 인해 서로 자존심 다툼을 할 때는 당연히 다른 방으로 옮겨서 혼자 있고 싶었다. 또 한 이불 밑에 있기 싫었다. 있더라도 최소한 등이라도 휑하니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등을 돌리지 말자는 약속은 둘이 최소한 상대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 역시 미운 감정이 쓸데없이 더 자라는 것을 막는데 도움이 됐다. 문제가 이튿날까지 해결 안되면 또 하룻밤을 서로 말없이 한 이불에서 자야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대화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는 집안일 분담이었다. 밥 짓기는 누가하고, 빨래는 누가하고 식의 기계적 구분은 하지 않되 집안일을 서로 분담하기로 했다. 기계적인 구분은 결국 내가 더 많이 일했느니 어쩌니 하면서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서로 잘 하는 것 위주로 스스로 찾아서 하되, 한 사람이 밥 하면 다른 사람은 설겆이 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분담하기로 했다. 이 부분 역시 그렇게 서로 불만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 미국 연수시절 애틀란타에서 가족과 함께


지난주 결혼 16주년을 맞았다. 결혼 기념일에 영흥도 앞바다로 바람쐬러 갔다.


“당신, 나랑 지금껏 살면서 가장 행복하게 느꼈던 때가 언제였어?”


“글쎄, 그런 때가 있었던가? 아, 우리 창신동 아파트 팔 때 당신이 우리 첫 집인데 집안이라도 구경하고 가야지하면서 나를 데리고 간 적 있었지. 그때 아 당신이 나를 이렇게 배려하는구나하고 고맙게 생각했지. 그때가 기억나네.”


“그것밖에 없어요?” “대단히 많을 줄 알아요? 특별히 속상했던 한번을 빼고는 다 괜찮았어요. 됐나요? 이제 답변이.”


16년을 같이 살다보니 이제는 작은 것으로 서로 오해하지 않고 대신 서로 편들어주고 작은 허물은 감싸줄 정도는 된 것 같다. 따라서 더 이상 특별한 약속을 하지 않으며, 또 옛날 약속에 서로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세가지 약속은 내가 남몰래 소중히 생각하는 삶의 자산이다.


(2006.4.12.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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