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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함을 지나 희망으로

김성수 푸르메재단 이사장 (성공회대 총장)

참 좋은 계절의 한가운데 와 있습니다. 가을 하늘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이 눈부신 가을 하늘을 평생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하고 아까워 견딜 수 없다고 해마다 얘기하기도 합니다. 쾌적한 날씨 덕분에도 그렇겠지만 무엇보다도 나눔의 계절, 감사의 계절이기 때문에 가을이 되면 사람의 마음도 넉넉해지는 것 같습니다.
가을이 왜 나눔의 계절인고 하니, 가을걷이라는 것이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수확이지만 자연으로 보자면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이지요. 생명을 나눠준 자연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또 인간의 자연에 대한 도리일 것이고, 그래서 그런 나눔과 감사의 축제가 추석 명절이 된 것이겠지요.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한 듯 누리고 있는 것들이 사실 따지고 보면 미안한 일일 때가 많습니다. 벼가 알곡을 맺으면 다 털어다 먹고, 과일이 탐스럽게 영글면 따다 먹고, 꿀벌이 열심히 모아놓으면 통째로 들어다 먹고…

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먹는 것 같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그게 그리 당연히 여길 일만은 아니죠.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반드시 내 노력만으로 된 게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감사의 기본입니다.

‘내가 땀흘려 일했으니 내가 얻은 수확은 당연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이 세상에 감사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러나 살면 살수록 느끼는 거지만, 세상에 당연한 것이라곤 없어 보여요.

오늘도 내가 숨을 쉬고, 밥을 먹고, 걸어서 집에서 나오고… 이 모든 게 당연한 일이에요? 왜 내게 이런 일들이 당연한 일이어야 하는지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해요.

튼튼한 다리를 가졌을 때는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 줄 잘 모르고 그냥 당연하게 여기면서 걸어다닙니다. 두 다리로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이 이 까마득한 계단을 몇 차례나 내려갔다 올라와야 교차로를 건널 수 있을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버스를 갈아타고 집에 갈 수 있을지… 그런 거 잘 모르고 삽니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모르고 살아도 되나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 돼요.

‘나는 이렇게 건강하니 얼마나 다행이야. 아이구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건 감사가 아니에요. 그러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뭐라고 하냔 말이에요.

복음서에도 보면, 이렇게 얌체같이 기도하는 게 제일 나쁘다고 예수님이 대놓고 야단치셨잖아요.

내가 지금 당장 불편함 없이 살고 있어도, 다른 사람은 어떤지 항상 살펴야 합니다.

성베드로학교(성공회대학교 부설 특수교육기관)

가을이면 학교마다 운동회를 하지요. 우리 성베드로학교 아이들도 운동회를 합니다.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몰라요. 다른 일반 학교 아이들하고 다를 게 없죠. 그런데 이 친구들 달리기나 과자 따먹기 할 때 보면 다른 아이들과 많이 다른 걸 발견하게 됩니다.

출발신호가 울리면 있는 힘을 다해 뛰지요. 그렇게 열심히 달리다가 꼭 뒤를 돌아봐요. 봤는데 뒤에 쫓아오는 친구가 영 못 따라오고 있으면 ‘어?’ 하고 얼른 되돌아 뛰어가서 친구 있는 데서부터 다시 뛰어요.

이 친구들 이런 모습 보면서 ‘원래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이렇게 착하구나.’하고 느끼게 됩니다. 이런 것이 원래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데 여기다가 자꾸만 ‘다른 애 신경쓰지 말고 너나 잘해라’ ‘너는 안 넘어졌으니 다행이다’ 이렇게 비뚤게 가르치면 안돼요.

뜨거운 여름을 지나 풍성한 가을을 맞게 되듯이, 우리 사회도 치열함을 지나 이제 넉넉하고 따뜻한 나눔의 희망을 곳곳에서 보게 됩니다.

몸이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 능력이 없는 사람… 그 누구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존엄성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내 가던 길 멈추고 되돌아가 손잡고 같이 가자고 하는 착한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질병이나 사고를 당해서 장애를 입게 되었을 때 그 환자와 가족이 겪게 될 극심한 충격과 고통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고통과 부담을 환자와 가족이 그대로 떠안아야 하기 때문에 그 고통이 더 클 수밖에 없지요. 이런 것은 사회 전체가 분담해야만 합니다.

개인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에 대해서는 사회 전체가 나서서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하겠다고 시작된 것이 민간 재활전문병원 건립을 위해 설립된 푸르메재단(http://www.purme.org) 입니다. 시작된 지 이제 막 1년이 지났는데 정말 많은 분들이, 지금 당장은 장애와 아무 관련도 없는 많은 분들이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리없이 들불처럼 번져가는 나눔 운동의 확산을 보면서 뜨거운 희망과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 당장 아무 일 없을 때에, 넉넉하고 편안하게 살고 있을 때에, ‘그래, 이때다!’ 하고 부지런히 다른 사람을 살피고 나누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기를, 그래서 그걸 가지고 서로 더 잘하려고 다투는 사회가 되기를 꿈꿉니다. 얼마 멀지 않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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