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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저만치

박원순 (푸르메재단 이사/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1998년 나는 미국을 두달째 여행하고 있었다. 미국사회 곳곳을 둘러보고 견문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국무성, 검찰청, 교도소에서부터 기업, 대학 등 다양한 기관과 단체를 방문하고 인터뷰하였다. 미국사회가 지닌 여러 모습을 면밀히 살펴보고 꼼꼼이 기록해 책으로 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눈에 번쩍 뜨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재단’의 발견이었다.

노스 케롤라이나의 ‘트라이앵글 리서치 커뮤니티 파운데이션’, 피닉스의 ‘메이커 위시 파운데이션’ 등이 나의 영감을 자극한 재단들의 이름이었다. 마침내 그후 이 영감은 나를 뉴욕의 ‘재단연합’ (Concil on Foundations)과 ‘제3섹터’(Independent Sector)를 방문하게 만들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 역시 기업가로서의 명성도 명성이지만 자선과 기부에서의 명성도 이에 못지 않다. 1994년 1월 1일 메린다 게이츠와 결혼한 그는 자선재단 빌 엔드 멜린다 게이츠 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을 창립했다. 이 재단을 통하여 그가 전 세계에 걸쳐 전체기부금 이외에 교육, 보건, 인구문제, 기술발전 문제 등에 직접 무상 공여한 교부금만도 70억달러를 넘는다. <비지니스위크>지는 지난 98년부터 2002년까지의 기부총액을 기준으로 순위를 매긴 결과 이 재단이 4년간 235억달러(약23조 5000억원)로 1위를 차지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빌 게이츠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의 60%에 해당하는 액수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부자가 하는 자선의 한 예일 뿐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선은 이미 부자의 한 습관이고 문화가 되었다. 미국의 부자들이 존경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굳이 ‘청교도적’이라는 접두사를 붙이지 않더라도 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한 제도로서 성숙하고 발전하려면 이런 부자들의 아름다운 기부와 나눔의 행태가 전제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기업재단 보다는 미국에서는 개인재단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약 89%의 재단이 개인재단인 것이다. 현재 미국에는 약 6만6000개에 이르는 재단들이 있다. 이들은 전국에 산재하면서 동네의 부의 다과를 불문하고 일반 시민들로부터 일상적인 모금활동을 하면서 기부액과 기금의 규모를 계속 늘려가고 있었다. 지난해 한 해만 해도 총 324억달러(약 32조 4000억원)를 모금하여 303억달러를 기부한 2003년에 비해 4.1%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나는 당시 미국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예정대로 그 인터뷰와 관찰을 책으로 펴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내 책은 겨우 수천부에 팔리고 말았다. 나는 초판밖에 안팔리는 이른바 ‘초판클럽’의 멤버였던 것이다. 그러나 책을 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미국 재단들의 규모와 역할에 대해 큰 감동을 받았던 나는 주변 인사들에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종류의 재단 창립을 꼬드겼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재단이란 부자가 큰 돈을 내놓고 그 기금으로 장학금이나 주고 문화사업이나 하는 것이 상례였다. 더구나 상속의 한 편법으로 재단이 활용되는 것이 숨길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런데 평범한 시민들로부터 모금하고 시민들과 지역사회를 위해 사용하고 시민들의 관점에서 운영해가는 그런 재단이 생겨나야 하지 않는가라고 나는 설득했다. 이렇게 창립한 것이 아름다운재단이었다.

1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정식으로 창립한 것이 2000년 9월이었으니 올 9월이 되면 아름다운재단은 5주년을 맞는다. 아직 신생재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름다운재단의 꿈은 야무졌다. 단지 모금을 위한 재단일 뿐만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기부문화를 확산시켜보자는 것이 우리의 첫째가는 목표였다. 그리하여 언론과의 켐페인을 끊임없이 전개하고 기부지수를 개발하고 연구소와 도서관을 설립하고 기부문화총서를 출판하고 모금강좌와 국제세미나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특히 자신의 수입과 가진 모든 것의 작은 부분을 이웃과 나누자는 1%나눔운동과 헌물건을 기부받아 수선하고 이를 팔아 그 수익을 나누려는 ‘아름다운가게’운동은 나눔과 기부를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적인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다.

이렇게 하여 1%에 참여한 사람들만 이제 2만 3천명을 넘고 그 누적 금액도 50억원이 넘어 섰다. 개미군단의 위력이다. 그러나 규모만으로 이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 속에는 행상, 구두닦이, 사회복지 수급권자 등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하층민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들어있다.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도움에 나선 것이다. 막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위한 1%, 결혼 축의금을 모아 신혼의 출발을 나눔과 함께한 신혼부부도 있다. 아름다운재단 1% 나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그 하나 하나가 눈물과 감동이다. 아름다운가게도 창립 3년만에 전국에 44개가 들어섰다. 수십만명의 기증자, 구매자, 2천명이 넘어선 정기적 자원활동가들이 모두 천사(실제 아름다운가게에서는 이들을 기증천사, 구매천사, 활동천사라고 부른다)들 처럼 일상적인 나눔에 참여하고 있다. 거의 모든 언론이 나눔을 화두로 다양한 자선켐페인을 펼치고 있는 것도 아름다운재단의 나눔운동의 한 여파라고 본다. 이제 나눔은 분명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사람들은 세상의 각박함과 살벌함에 한탄을 보낸다. 과연 이웃을 위해 자신의 곳간을 열고 호주머니를 터는 사람이 있을까 의심한다. 헌물건을 쓰지 않는 한국사람들에게 재활용자선가게인 아름다운가게 장사가 안될 거라고들 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한국사람들은 원래 인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옆집의 어려움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 민족이다. 나는 가난한 농촌에 살면서 자신의 집 곳간이 비었는데도 구걸오는 거지를 그냥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수없이 보면서 자랐다. 비록 우리가 일제치하의 혹독한 고난과 분단과 전쟁, 가난과 독재의 수난을 거치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기는 했지만 우리의 본성을 되살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보았다. 아름다운재단 5년을 지나면서 나는 그 인식이 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부자와 가난한 이들 모두가 좋은 명분과 정확하고 투명한 회계, 전문적인 지식만 갖추고 있으면 기꺼이 기부하고 참여하려 하였다.

물론 아직은 세계 최고의 자선 사회인 미국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기부자에게는 인센티브가 따르는 조세제도가 도입되어야 하고 어릴 때부터 나눔의 습관이 몸에 배야 한다. 눈 앞에 굶주리는 사람을 보고 돈을 내는 즉자적이고 감성적인 기부 보다는 어느쪽에 돈을 내는 것이 가장 사회의 풍요와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잘 판단하는 이성적인 기부로 바뀌어야 한다. 자식에게 무조건 모든 것을 물려주어 자식의 독립심을 해치고 형제들끼리의 분쟁을 야기하는 상속 관행도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보람되고 훌륭한 삶이며 삶의 성취로서의 자산을 어떻게 정리하는 것이 가장 보람있는 삶으로 만드는지에 대한 철학적 성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목수가 연장을 탓하는 것처럼 모금운동가는 기부환경이나 기부법제, 주변환경을 탓할 수는 없다. 기부운동을 전개하는 모금단체들의 전문성과 투명성도 이러한 아름다운 사회를 앞당기는 데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다른 나라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지역재단(community foundation)도 많이 늘어나야겠다. 그러고 보면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그러나 희망은 저만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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