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겠죠?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 장혜영 감독


 


발달장애를 가진 장혜정 씨는 열세 살부터 서른 살이 넘도록 시설에서 살았습니다. 무려 18년이나 장애를 이유로 사회에서 ‘격리’되어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 혜정 씨를 시설 밖으로 이끈 건 한 살 터울의 둘째 언니 혜영 씨였습니다.


18년 만에 시설에서 나와 새로운 여정을 걷고 있는 장혜정 씨와 둘째언니 혜영 씨
18년 만에 시설에서 나와 새로운 여정을 걷고 있는 장혜정 씨와 둘째언니 혜영 씨

두 자매의 이야기


어릴 적 동생과 한 몸처럼 지냈던 혜영 씨는 부모님의 결정으로 동생이 시설로 보내진 후 학교를 다니고 일을 하는 동안 한시라도 동생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세계가 넓어질수록 커져만 가는 동생의 빈자리. 삶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던 동생에게 돌아가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 포스터 (출처 : 다음 영화)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 포스터 (출처 : 다음 영화)

18년 만에 한 집에서 좌충우돌 동거를 시작한 자매.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유튜버인 혜영 씨는 동생과의 일상을 차곡차곡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해 개봉한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합니다. 파스타를 해먹고,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동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노래를 배우며 춤을 추고, 스티커 사진을 찍고,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 즐거운 추억을 만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며 일상을 함께하는 두 자매 (출처 : 다음 영화)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며 일상을 함께하는 두 자매 (출처 : 다음 영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을 누리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혜정 씨 스스로 좋아하는 것들을 선택하고 이제껏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장면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장애 극복’과 ‘가족 희생’이라는 맥락에서가 아니라 서로 호흡을 맞춰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서 말입니다.


두 자매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책, 강연을 통해 관심과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회적 관계 안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때론 다투기도 하면서 한 인간으로 존중받고 성장하는 과정을 누구나 차별 없이 동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자기다운 삶의 방식을 찾다


지난 5월, 혜정 씨의 전시회에서 두 자매를 만났습니다. 애창곡 <반갑습니다>와 만화 주제가 <세일러문>을 거리낌 없이 부르며 흥겹게 리듬을 탔던 혜정 씨의 또 다른 취미가 그림 그리기였다고. 2년 동안 그려온 작품 50여 점을 모아 생애 첫 전시회 <너의 궁금한 정원>이 열렸습니다.


첫 개인 전시회에서 언니와 친구들의 환호 속에 춤을 추고 있는 혜정 씨
첫 개인 전시회에서 언니와 친구들의 환호 속에 춤을 추고 있는 혜정 씨

오프닝 날, 강렬한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관람객을 맞은 혜정 씨는 자신의 색깔이 가득한 공간을 자유로이 활보하며 춤을 췄습니다. 혜영 씨가 “동생이 정말 좋아해요. 여기가 자기 사무실이라며 집에도 안 가려고 해요”라고 귀띔합니다.


사실 전시회를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쌓아둔 그림들을 보는데 완성도가 높은 거예요. 자신의 이야기를 이미지와 텍스트로 그리는데 늘 궁금했던 동생의 생각을 본 것 같아 기뻐요. 동생을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는 존재라 단언했던 이들한테 명확한 의도를 갖고 완성된 작품들로 반격을 줬다는 점에서 통쾌합니다.”


혜정 씨가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한 작품
혜정 씨가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한 작품

이번 전시회의 관전 포인트는 화풍의 변화를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인물 드로잉이 중심이었다면 점차 면과 색채를 적극적으로 조합하고 활용해 메시지를 표현했습니다. “자기다운 삶의 방식을 찾은 것 같아요. 혜정에게 그림으로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혜정 씨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또 묻는 기회인 셈입니다.


시각예술에 관심이 깊은 관람객들의 ‘평가’는 혜정 씨의 작품 활동에 의미를 더해줍니다. “모든 맥락을 떠나서 작품 자체로 좋으니 작품으로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도록 계속 관리를 잘해 달라는 말에 공감했어요. 장애인이 그려서 특별한 게 아니라 그냥 특별한 작품이니까요.” 이를 방증하듯 판매 완료를 알리는 스티커가 작품마다 붙어 있습니다.


인간다운 사회를 열망하는 든든한 곁


혜영 씨는 동생에게 건강하고 풍부한 관계망이 생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장애의 유무를 떠나 결국 모두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동료들에게 동생의 탈시설이 궁극적으로 인간다운 사회를 위해 기여한다고 생각한다면 같이하자고 얘기했어요. 시혜나 동정이 아닌 약속으로 할 수 있는 일에 자신의 시간과 자원, 마음을 쏟았죠.”


관람객에게 사인과 함께 “괜찮아, 잘 될 거야.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써준 혜정 씨
관람객에게 사인과 함께 “괜찮아, 잘 될 거야.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써준 혜정 씨

언니의 초대로 맺어진 인연의 고리 안에서 안전감을 느끼는 혜정 씨. 친구들과 자연스레 어울려 수다를 떨고 재미난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서로를 돌볼 줄 아는 마음이 연결된 타인들이 곁에 있다면 제가 없더라도 그 속에서 잘 살아갈 수 있어요. 신뢰에 기반한 관계망이 상당히 마련된 것 같아요.” 두 명의 동료는 혜정 씨의 활동지원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혜정 씨의 삶은 ‘자립’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자립’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도움과 보살핌 속에서 세상에 다시 없는 존재로서 ‘자기다움’을 위한 여행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언니 없이 친구들과 캠핑카로 떠난 여행지에서 (출처 : 생각많은 둘째언니 유튜브)
언니 없이 친구들과 캠핑카로 떠난 여행지에서 (출처 : 생각많은 둘째언니 유튜브)

더 많은 장애인들이 자기만의 속도대로 삶을 가꿔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만일 과거의 엄마에게 스물네 명의 친구들이 있어 매일 한 시간씩 돌아가며 혜정이를 돌보아주었다면 어떠했을까.’ 혜영 씨는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를 강조합니다. 돌봄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가족이 떠안지 않고 가족 구성원 모두가 온전한 시간을 누리며 살 수 있는 토대인 것입니다.


“장애인 당사자를 시설로 보내게 되는 이유는 가족이 힘에 부치기 때문이에요. 가족 중의 한 사람이 그림자가 되어버려야 하죠. 24시간 활동지원서비스가 있다면 활동지원사는 자신의 일을 하면 되고, 장애인은 전문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살면 되고, 가족은 자신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요.”


늙어서도 ‘하하하’ 웃을 수 있다면


‘혜정이와 같이 살기 위해서는 두 개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는 나의 시간, 하나는 혜정이 언니의 시간.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전제로 하는 진짜 나의 시간’을 찾고 싶었던 혜영 씨. 시간이 흐르자 변화가 생겼습니다. “두 시간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겹쳐있어요. ‘장혜영’과 ‘혜정의 언니’는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답게 살아가는 한 인간인 거예요.”


그러면서 부모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을 가진 비장애형제·자매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답니다. “자기 자신이 되기 전에는 누구의 형제자매가 될 순 없어요. 인생의 모든 국면에 장애형제를 어떻게 포용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전에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찾아야 해요. 그러면 장애형제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보일 거예요.”


자신의 삶을 중심에 둬야 장애인 형제‧자매와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조언하는 혜영 씨
자신의 삶을 중심에 둬야 장애인 형제‧자매와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조언하는 혜영 씨

동생과 하나둘 해나가는 시도들은 ‘프로토타입’을 보여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저희라서 특별한 게 아니라 언젠가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삶이 당연해지면 좋겠어요. ‘운 좋은 혜정’의 사례로 회자되지 않고 실제로 사회를 바꾸는 동력이 되길 바랍니다.” 사적인 경험이 공적 체계로 흡수되어 장애인과 가족들을 위한 복지로 이어지길 희망한답니다.


혜영 씨는 장애인들만 모아놓고 진행하는 ‘장애인 일자리’를 경계합니다. “피아노를 배운다고 하면, 장애인을 위한 피아노 학원이 아니라 내가 사는 동네의 피아노 학원에 갈 수 있어야죠. 비장애인이 그렇듯 평범한 삶의 공간에서 다양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첨단IT기술과 농업이 결합된 일터인 푸르메스마트팜에 대해서는 “자연은 늘 큰 의미를 가져요. 그런 일터가 맞을지는 혜정에게 달려 있지만, 자연 속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좋아할 거예요. 일을 하라고 하면 순간 짜증을 내겠지만요(웃음)”라며 푸르메재단이 좋은 모델을 제시해주길 기대합니다.


“저희의 경험이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길잡이가 되면 좋겠어요.”
“저희의 경험이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길잡이가 되면 좋겠어요.”

먼 미래를 계획하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하려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최선을 다하면 전혀 보이지 않았던 선택지들이 나타나요. 전시와 공연을 하고 여행을 가게 된 것처럼요. 저희의 세계가 조금씩 확장되고 있지요. ‘어른이 되면’은 계속 만들 겁니다. 10년쯤 지난 중년과 노년을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두 자매의 꿈은 대단하거나 거창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다움을 잃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그래서 늙어서도 좋아하는 단골 가게에 손을 마주잡고 앉아 하하하 마음껏 웃게 되는 것. ‘무사히 할머니가 되자’를 노래하는 둘의 여정에 더 많은 장애인, 가족, 동료, 친구, 이웃, 우리의 이야기가 울려 퍼진다면 좋겠습니다.


*글, 사진= 정담빈 대리 (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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