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증발달장애인의 하루를 다시 쓰다

최중증발달장애인의 하루를 다시 쓰다
‘사람 중심 적극적 지원’이 보여준 희망



온종일 커피를 찾던 최중증발달장애인 기훈(가명) 님. 건강을 염려해 커피를 하루 2잔으로 제한하자, 그는 거친 행동으로 불만을 표현하곤 했습니다. ‘통제’와 ‘제한’으로 얼룩졌던 그의 일상을 바꾼 건 작은 관점의 변화였습니다.
기훈 님을 지원한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의 고동환 사회복지사는 그가 커피머신 앞을 서성이는 모습에서 ‘문제 행동’ 대신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기훈 님이 직접 커피를 내릴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했지요. 기훈 님에게 ‘바리스타’라는 역할을 맡기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커피를 달라고 떼쓰는 대신, 스스로 원두를 갈고 향을 즐기며 천천히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는 ‘통제’가 아닌 ‘지원’이 만든 기적 같은 변화였습니다.


‘도전행동이 심한 최중증발달장애인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까’. 오랫동안 이 질문의 답은 ‘통제’와 ‘관리’로 여겨졌습니다. 그 답 속에 장애인 당사자의 생각과 선택은 들어갈 수 없었지요.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은 질문의 방향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도전행동을 어떻게 막을까?’가 아니라 ‘당사자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로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답을 찾는 방향도 바뀌었습니다. 바로 장애인 당사자의 내면과 일상에 그 답이 있었습니다.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은 장애인 당사자의 하루와 삶의 경험을 들여다보며 ‘사람 중심의 적극적 지원’을 시작했지요. 그리고 그 과정과 성과를 지난달 16일 온라인 공유회를 통해 나눴습니다.


‘도전행동’이 아니라 ‘삶의 신호’로 바라보기


최중증발달장애인에게 왜 ‘사람 중심의 적극적 지원’이 필요할까요? 최중증발달장애인은 안전을 이유로 과잉보호되거나 무계획적으로 방치되면서 하루하루가 목적 없이 흘러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루 중 의미 있는 활동 시간이 거의 없지요. 최미영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장은 “의미 있는 활동이 부족할수록 장애인 당사자는 사회에서 고립되고, 그로 인해 좌절과 불안감이 커져 도전행동이 늘어난다”며 “이렇게 도전행동이 늘면 사회적 활동에서는 더 배제되는 악순환이 생긴다”고 설명했습니다.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은 도전행동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이 왜 나타났는지를 삶의 맥락에서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의미 있는 활동(관계)’에 참여할 기회를 당사자의 하루 속에 촘촘히 설계하는 것이 바로 사람 중심 적극적 지원의 출발점이었습니다. 풍요로운 일상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도전행동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루의 모든 순간을 ‘참여의 기회’로



사람 중심의 적극적 지원은 어디서 시작할까요? 고동환 사회복지사는 “일상의 매 순간에서 가능성을 찾으라”고 조언합니다. 식사 준비, 청소, 세탁, 산책, TV 보는 시간, 이동하는 시간까지 하루의 모든 순간이 ‘참여 기회’가 된다는 뜻입니다. “다양한 활동에 관여할수록 행복감을 느끼고 신체·정서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받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당사자의 성장과 ‘나는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 형성에 기반이 됩니다.”
하지만 갑자기 활동 기회를 늘린다고 해서 당사자가 이를 바로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 복지사는 “당사자가 활동을 거부할 때는 ‘아주 작은 성공의 경험을 할 수 있게 도왔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며,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계부터 가능성을 찾을 것을 강조했습니다.
당사자의 일상을 세심하게 관찰할수록 다양한 기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복지관 창고와 택배실에 몰래 들어가는 행동으로 제지를 받던 기훈 님의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기훈 님을 잘 관찰해 보니 카트를 안정적으로 조작하는 능력이 있었고, 과거 다른 기관에서 물건을 운반해 본 경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하지 말라고 막는 대신, ‘택배 담당자’라는 역할을 부여해 물건을 직접 나를 기회를 줬습니다. 택배 담당자가 되어 ‘나도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자, 창고에 숨어들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었습니다.”


활동은 ‘짧고 단순하게, 자주’


최중증발달장애인은 새로운 활동이나 복잡한 과제에 쉽게 압도되거나 피로를 느낍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활동 전체에 전부 참여하게 하지 않고 일부 단계만 참여할 수 있게 계획해야 합니다. 1분, 3분, 5분처럼 짧게 시도하면서 점차 참여 시간을 늘려갑니다.  최재성 사회복지사는 “활동을 짧게, 자주 반복할수록 장애인 당사자가 느끼는 부담이 줄고 익숙해지면서 그 활동을 좋아하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최재성 복지사가 지원했던 해진(가명) 님은 “안 해요”, “안 먹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이는 어릴 적부터 경험한 수많은 실패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인 말이었습니다. 최재성 복지사는 해진 님과 느리게 친해지기로 했습니다. 해진 님은 손으로 하는 감각 활동, 특히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흔드는 것을 좋아했는데, 최재성 복지사는 그가 나뭇가지를 흔들며 다닐 때 옆에서 같이 나뭇가지를 흔들며 걸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해진 님에게 최재성 복지사는 ‘나뭇가지를 같이 흔드는 친구’가 돼 있었습니다. 그러자 “안 해요”라는 말 대신 최재성 복지사의 권유를 받아들이는 빈도가 늘었습니다.
“해진 님과 가까워진 뒤에 ‘긴 막대기를 흔든다’는 공통점에 착안해 나뭇가지를 붓으로 바꿔 ‘그림 그리기’를 권했어요. 지금은 그림이 해진 님의 취미가 되었죠. 지원자는 당사자에게 ‘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활동을 시작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활동의 질이 달라지니까요.”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딱 맞는 지원 필요


장애인 당사자마다 필요한 도움의 수준은 모두 다릅니다. 최성욱 사회복지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딱 맞는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지원, 즉 ‘맞춤형 차등 지원(Graded Assistance)’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최성욱 복지사가 지원한 재원(가명) 님은 혼자 식사하는 것을 어려워했습니다. 처음엔 식사에 집중하지 못해 밥을 먹다가도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숟가락 대신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곤 했습니다. 최성욱 복지사는 재원 님의 행동을 ‘문제’가 아닌 ‘신호’로 다시 보았습니다.
우선 재원 님이 ‘사람 구경’을 좋아한다는 점을 파악해, 식사 자리를 식당 구석에서 사람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보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자, 지시 없이도 식사에 집중하는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남은 과제는 ‘숟가락 사용’이었습니다. 최성욱 복지사는 ‘숟가락으로 밥 먹기’라는 어려운 과제를 서두르지 않고 아주 세밀하게 나누어 접근했습니다.
“처음에는 숟가락 사용 자체를 어려워하셔서, 제가 밥과 반찬을 숟가락에 올려 입 앞까지만 가져다드렸습니다. 숟가락의 감각에 익숙해지도록 돕는 과정이었죠. 그다음 단계로는 제가 숟가락을 쥔 재원 님의 손을 함께 잡고 밥을 뜨는 동작을 반복하며 근육의 움직임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땐 혼자서 뜰 수 있도록 지켜보며, 음식을 흘리더라도 숟가락을 들려는 ‘시도’ 자체를 칭찬해 드렸습니다.”
재원 님은 이제 스스로 숟가락을 들어 식사를 마칩니다. 최성욱 복지사는 “우리의 역할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자의 인생에 ‘성공 경험’이라는 밑그림을 그려주는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계획받는 삶에서 ‘계획하는 삶’으로


사람 중심의 적극적 지원은 장애인 당사자가 수동적인 돌봄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게 하는 과정입니다. 선택과 통제는 인간의 기본 권리입니다. 일상에서 무언가를 선택해 본 경험이 많을수록 자신감이 높아지고 도전행동은 줄어듭니다. 김진래 사회복지사는 “무엇을, 언제, 누구와 할지 등 활동 속에서 장애인 당사자가 선택할 수 있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많이 만들어주라”고 전했습니다.
김 복지사가 지원한 성찬(가명) 님은 시설 거주 시절, 식사부터 일과까지 모든 것이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관리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30대의 나이에도 그에게 ‘선택권’은 없었기에, 그는 자신의 삶에서 주인공이 아닌 ‘손님’과 같았습니다.
김 복지사는 성찬 님에게 아주 사소한 질문부터 던졌습니다. “우유 드실래요, 주스 드실래요?” 성찬 님이 선택하면 반드시 그대로 지원했습니다. ‘내 선택이 현실이 된다’는 경험이 쌓이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스무디를 먹겠다”며 자신의 취향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전 같으면 고집이라 생각했을 행동을 김 복지사는 ‘자기주장(Self-Advocacy)’으로 존중했습니다.
나아가 성찬 님은 점차 “싫어요”라며 지원자가 준비한 프로그램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 복지사는 당황하지 않고 이를 건강한 신호로 보았습니다.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힘이야말로 내 삶을 지키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신감이 생긴 성찬 님은 “내일 뭐 하지?”, “주말엔 어디 가지?”를 고민하며 미래를 계획합니다. 언어적 표현이 어려울 땐 지도 앱을 켜고 가고 싶은 곳을 고릅니다. “이번 주말에는 PC방에 가겠다”며 자신의 일주일을 직접 디자인하는 성찬 님의 표정은, 누군가 데려다준 곳에 갔을 때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우리는 ‘행동’이 아니라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람 중심의 적극적 지원’은 특별하고 어려운 기법이 아닙니다. 장애인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입니다. 도전행동을 기준으로 당사자를 판단하는 것을 멈추고, ‘당사자의 하루가 과연 어떤 의미 있는 경험으로 채워져 있는가?’를 먼저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의 작은 순간이 모여 변화는 시작됩니다. 관리되는 삶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통제하는 삶으로, 수동적 관찰자에서 ‘내 삶의 주인’으로 나아가는 여정. 사람 중심의 적극적 지원이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모두의 일상이 되는 그날을 향해, 푸르메재단과 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그리고 13개 산하기관은 멈추지 않고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글=오선영 부장(마케팅팀)
사진=서울장애인종합복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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