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레일에 이야기를 싣고… 청년의 기차는 달린다

[열정무대] 로사이드(Rawside) 김동현 창작자 


 


“빨간색은 옛날 경품선 전철이에요. 이 기차가 여기로 다녔어요.” 널찍한 스케치북에 촘촘히 그려진 노선도를 가리키며 청년은 말합니다. 처음 들어보는 노선과 역 이름을 들으며 잠시 환상 여행을 떠납니다. ‘진짜 있는 곳인가?’하고 진지한 얼굴로 귀를 쫑긋 세우기도 여러 번.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실제와 상상이 한데 버무려져 있는 작품에 빠져듭니다. 세밀한 묘사 속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이 밀도있게 담겨있습니다.


노트 너머의 세상으로 나오다


작품을 그린 주인공은 자폐성장애가 있는 김동현 씨입니다. 주로 전철, 기차, 노선도를 그리며 자신의 창작 세계를 알리고 있습니다. 첫 만남이 어색할 법도 한데 “마이크 진짜 좋죠? 노래 부를 때 하는 거예요.”라며 색깔점토로 만든 주황색 마이크를 손가락에 끼워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 이어지는 자기소개. “저는 22살 김동현입니다. 경기도 고양시에 살아요. 도서관에서 사서 보조로 일하고 있어요.”


▲ 직접 만든 점토 마이크를 쥐고 작품 설명을 하고 있는 김동현 창작자
▲ 직접 만든 점토 마이크를 쥐고 작품 설명을 하고 있는 김동현 창작자

김동현 씨는 로사이드에서 창작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로사이드는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독자적으로 창작활동을 하는 사회적 소수자를 발굴하는 비영리예술단체입니다.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과 교감하고 작업하는 아트링크를 진행합니다. 미술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창작자들과 그들이 표현한 창작물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장을 모색하기 위해서입니다.


김동현 씨 또한 미술을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이면지나 노트에 연필로 그리고 싶은 것을 가득 채워나갔을 뿐입니다. 그러다 7년 전 중학교 특수학급 문화예술수업 때 현재 로사이드의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최선영 씨의 눈에 띄었습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그의 그림을 잊을 수 없어 먼저 연락을 했다고 합니다. 동네 카페에서 만나 김동현 씨는 색연필로 그림을 그렸고 최선영 씨는 옆에서 바느질을 하며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 엄마 심부름 갈 때, 놀러갈 때, 출근할 때 탈 수 있는 기차들과 기차노선표 등을 그린 노트
▲ 엄마 심부름 갈 때, 놀러갈 때, 출근할 때 탈 수 있는 기차들과 기차노선표 등을 그린 노트

로사이드를 알게 되면서 작업 반경이 이전보다 넓어졌습니다. 남들은 무의미하게 여겼을지 모를 ‘낙서’들이 이름과 색깔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최선영 기획자는 “동현 씨가 마카를 처음 썼을 때는 그림이 어두운 편이었는데 지금은 강약을 나타내면서 화면을 다이나믹하게 구성해요. 빽빽하게 칠하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자기의 그림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과 만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성실철’을 타고 콘서트 보고 ‘안정궁’에 들러요!


“먼저 재미있는 것부터 보여드릴게요.” 작품들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그림을 펼칩니다. “식품선에서 전철타고 첨성대를 갔다가 불국사를 거쳐 석굴암 갔다가 안압지에 갔다가 왕릉에 갔다가 천마총에 가요.” 긴 노선도 곳곳에 관광지와 역 이름들이 적혀 있습니다. 아파서 못 간 수학여행지 경주에 대한 상상이 애틋하게 담겨있습니다. 상상력으로 탄생한 ‘식품선’을 타고 경주를 여행하는 색다른 방법입니다.


▲ ‘식품선 식품-경주’ 종이 위에 마카, 색연필. 2013년작 (이미지 제공 : 로사이드)
▲ ‘식품선 식품-경주’ 종이 위에 마카, 색연필. 2013년작 (이미지 제공 : 로사이드)

이번엔 부산으로 가봅니다. 부산의 지하철을 호선별로 구분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해운대역, 광안대교, 누리마루, 동네파전역, 부산역, 불가마사우나, 지하철을 개조한 불가마사우나와 찜질방 등 익숙하고 낯선 지명이 공존합니다. 로사이드 고재필 공동대표는 “구체적인 지명에 대한 기억이 뛰어나고 자기가 직접 유머러스한 지명들을 만들기도 해요.”라고 덧붙입니다.


▲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노선의 다양한 역과 터널들로 재밌는 이야기가 완성된다.
▲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노선의 다양한 역과 터널들로 재밌는 이야기가 완성된다.

작품에는 인천 소래포구가 단골역으로 등장하고 구불구불 이어진 노선에는 도리역, 청역, 물왕역, 성당 모양의 터널이 자리합니다. “여기로 쭉 가면 인천국제공항이 나와요. 도라산이랑 백마고지 거쳐서 금강산까지 갈 수 있어요.” 그러면서 ‘인천아시안게임경기장역’은 아직 생기진 않았다고 슬쩍 귀띔해 줍니다.


기차라는 주제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없어요.”라는 짧고 굵은 대답. “어렸을 때 여행을 많이 다녔었다고 해요.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봤던 걸 다시 그리기도 하고 이미 없어진 길이나 새로운 길을 상상하면서 그리기도 하죠.”라고 고재필 공동대표가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싶은 그림에서 다음 이야기를 만나다


막 터널을 지나려는 기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 원근법의 효과가 살아있는 작품이 흥미롭습니다. 변기에 앉은 분홍색 남자가 보이고 흰 색과 검은 색 바둑알들이 철로에 깔려 있습니다. “바둑알이 있으면 빠르게 지나갈 수 있어요. 서울에서 부산까지 한 방에 가요.” 기차가 초고속으로 달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 김동현 씨가 ‘고속철도 부산 금정 터널’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 김동현 씨가 ‘고속철도 부산 금정 터널’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그의 재기발랄한 작품들은 전시회를 통해 대중과 만나기도 했습니다. 2012년 경기도미술관에서 한국, 미국, 일본의 장애인 예술가들과 함께한 <다른 그리고 특별한> 전시회, 경매로 그림 한 점이 팔렸던 미국의 <아웃사이더 아트페어>가 그것입니다. 서울특별시북부병원 <함께 그리는 풍경> 프로젝트의 작가로서 정기적으로 환자들의 얼굴을 그려주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엽서와 노트 등 아트상품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다음 달 인사동 ‘갤러리 일호’에서 열리는 로사이드 그룹전시에서도 김동현 씨의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11월 10일에서 25일까지.


마지막 질문을 던졌습니다. 꿈이 무엇이냐고요. “아직 생각 중이에요.”라고 대답합니다. 꿈보다는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묻는 것이 옳은 것 같았습니다. “시화터널이요. 기차가 역을 지나가는 장면을 그리고 싶어요.” 그림 그리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듯 자꾸 “재미있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다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글, 사진= 정담빈 간사 (커뮤니케이션팀)


<김동현 창작자의 작품과 만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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